세종에 살리라…‘의병과 밀정’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는데도 조정의 관리들은 파벌 싸움만 하고 있었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백성들은 굶어주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그야말로 탐관오리들의 천국이었다. 참다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운동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살려고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님은 아버지와 황후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여, 일본군대가 멋대로 동학혁명군과 싸우겠다며 들어오는 것도 막지 못했다. 그래서 농민군은 무능한 관군만이 아니라 최신무기로 무장한 왜군과도 싸워야 했다.

맨손이나 마찬가지인 농민군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농민군들은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기개로 뭉쳤다.

농민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관군과 왜군들은 농민군의 좌우 양측에서 월등한 화력과 최신무기로 공격하여 수천 명을 학살하고 만다. 원래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농민군이 공주의 우금치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은 호의적인 민심과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한 결과였다. 그런 농민군이 그렇게 무참히 패한 것은

“동학군들이 이리로 와서 저리로 갑니다.”

무기의 탓도 있었지만, 농민군의 동태를 왜군에 샅샅이 알려주는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조선 사람이면서 왜인들에게 좋은 정보를 알려 주는 자들을 ‘토착왜구’라고 한다.

왜인들은 옛날부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동해를 건너와 마음대로 침탈했다. 그러다 거추장스러우면 불을 지르고 살생을 했다. 만행이 얼마나 심했던지, 신라의 문무왕은 죽으면서

“나를 동해의 바다에 묻거라.”

죽어서도 왜구를 물리치겠다며 바다 속 바위에 수장해달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토착왜구들이 어느 시대나 우리들과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구들이 필요한 정보를 훔쳐다 주고 그들이 던져주는 돈을 받으며 굽실거린다.

조선 숙종 때의 역관 박재흥은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을 위해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일본이 주는 돈으로 김해에 첩을 두고 살았다.

그런 토착왜구의 말을 믿은 숙종은 1694년에 “죽도는 일본 땅이다”라는 국서를 건네주고 말았다. 울릉도를 죽도라고도 불렀으므로, 죽도가 일본 땅이라는 것은 울릉도가 일본 땅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때 의병장 임대수처럼 나라를 걱정하는 안용복이 없었으면 울릉도를 일본에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조선이 망하자 많은 백성들이 조국을 떠났으나, 그들을 환영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 멸시와 천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옛날의 백제 유민들보다도 더 천대 받았다. 그런데도 총칼을 흔들며 건방을 떠는 왜놈들을 안보고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은 애국지사들은

“우리가 왜놈들보다 머리가 나쁜가, 키가 작은가.”

그런 생각이 들어 광복을 위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고달픈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런 독립투사를 밀고하는 방법으로 먹고살려는 토착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독립투사들과 친한 척 하다가, 왜놈들이 한두 푼 던져주면, 왜놈들이 원하는 정보를 모두 일러바친다.

그러다가도 독립투사를 만나면

“왜놈, 일본놈, 쪽발이”

가진 욕을 해대면서 또 다른 정보를 얻으려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매국활동이 영원히 들통 나지 않을 것으로 믿었겠지만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듣는 법.”

2017년 2월에 ‘모스크바대학’의 명예교수 박종효가 러시아 외교문서에서 한국인 밀정 34명의 명단을 찾아서 발표했다. 그것을 보아도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만강 북쪽의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역인 연해주는 독립운동가들의 본거지였다. 일본은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만주에 사관학교까지 설립했다. 토착왜구들은 돈 몇 푼만 받으면

“어느 날 몇 시에 어디에서 무엇을 한답니다.”

일본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알려주어, 독립투사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한다.

그랬던 토착왜구들의 이름이 밝혀진 것이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발각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겠지만, 결국은 그들의 악행이 천하에 알려져 후손들이 비난하지 않은가.

1910년과 1911년에는 2만 5천여 명이 만주의 간도로 이주하여, 1926년에는 중국인의 5배가 넘는 5만여 호에 이르렀다. 그런 곳에서 독립운동이 이루어지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고, 그것을 밀고하는 토착왜구가 섞여서 산 것도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토착왜구가 의병장 임대수가 활동하는 충청도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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