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 ‘금강과 쌀’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지금부터 50년 전이라면 아주 먼 옛날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50세가 넘은 사람 중에는 바로 엊그제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50년 전 쯤의 우리는

“숭늉처럼 맛있는 것이 없는데, 왜 쓴 커피를 마시나. 매국노처럼.”

커피가 맛있다는 사람을 역적 취급을 하며 애국자 행세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교과서에 숭늉 예찬론이 실리기도 하는 시절이었다. 또

“쌀밥이 좋은가, 빵이 좋은가.”

라는 담론이 벌어진 시기도 있었다. 밥보다 빵이 좋다거나 토스트에 쨈을 발라 먹는 것이 편하다며, 국에다 밥을 말아 먹어야 한다는 사람을 미개인 취급을 하려 했다. 하얀 꽃잎이 쌀을 닮았다는 이팝나무꽃을 보며

“옛날에는 저것을 보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지.”

배고팠던 시절을 상기하기도 했는데, 쌀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엿볼 수 있는 일들이었다.
 
보리밥이 유행하기도 하고 면류를 좋아한다는 사람도 많지만, 흰 쌀밥에 김치를 얹어먹는 행복을 말하는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된다. 해마다 쌀의 소비량이 준다며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식생활이 다양화되었다는 것이지 쌀밥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비싼 돈을 치루고 외식을 했으면서도

“김치에다 밥 한 숟갈 떠야겠다.

귀가해서 꼭 밥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벼가 언제부터 어디서 재배되었을까, 라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래되었고, 우리가 일본에 전해주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지구상에 벼농사가 맨 처음에 시작된 곳의 하나가 금강 유역의 옥천이란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나라를 일본에 침탈당한 후유증이다.

“인류의 기원이 어떻고, 그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라는 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서양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일을 우리가 아닌 일본에 물었고, 우리가 문명을 전해주었던 일본은 그것을 사실대로 인정하기 싫어서 사실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벼농사가 금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은 영원히 은폐될 수 없는 법. 우리가 나라를 되찾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게 되자, 영리하고 자존심이 강한 우리들은 훌륭한 선생이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배우려 했다. 그 결과 우리민족의 실체를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 둘씩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번 인식한 사실은, 그것이 잘못으로 판명되어도 그 인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옷을 걸친 원숭이라고 조롱하며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르고, 무지하고 비위생적이고, 냄새나고, 육체노동에 적합할 뿐 복잡한 일은 못한다. 복종적인 조선인은 어린애로 다뤄야 하는 열등 인간이다.”

라고 비하했는데, 우리는 그런 말에 중독되었는지,

“조선 놈은 팽이 성질이라 때려야 말을 듣지.”

스스로 우리를 폄훼하면서 우리의 능력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애들은 때려서 가르쳐야 한다”며 매질한 것을 자랑하는 어른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이 우수하다는 말이라도 할 것 같으면, 발끈 화를 내며 민족주의자고 비난한다.

지구상에 추위가 덥쳐 삼라만상이 꽁꽁 얼어붙는 빙하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견뎌낸 인간들은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며 살았는데, 그들에게 동굴만큼 안전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동굴이 많은 강원도 충청도 지역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그러다 보니 양식이 문제였다.

 사냥이나 채취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따뜻한 남쪽이나 해가 뜨는 동쪽에 거주하며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벼도 재배된 것이다.

남한강과 금강이 굽이져 흐르는 한반도의 중부지역에는 1,000여개의 석회암 동굴이 있어 빙하기를 견뎌낸 인류가 거주하기 좋았다. 추위를 견디며 창조해낸 것이 온돌이고 저고리와 바지, 치마와 저고리였다.

남한강이 흐르면서 만든 크고 작은 분지에는 담양 제천 음성과 같은 촌락이 형성되기도 했다.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이 북진하며 조성한 유역으로, 현재는 대청호에 잠긴 곳은 최적의 농경지로, 신석기 문명이 발전했던 곳이다. 그 물줄기기 부용산 자락에서 만난 미호천과 같이 흘러가며 농경지를 조성했다.

벼농사는 기원전 5세기 전후나 그보다 훨씬 앞선 기원전 11세기 전후에 이루어졌다고 하기도 하고, 기원전 20세기에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그런 가운데 충북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에서는 약 1만 7천년 것으로 판명된 볍씨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였다.

따라서 벼가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인식은 재고돼야 한다.

신석기시대의 한강과 금강 유역에서 벼를 비롯한 5곡의 재배 경작이 이루진 것을 신용하 박사는 ‘고한반도신석기농업혁명(古韓半島新石器農業革命)이라고 세계를 향해 주장한다.

남한강과 금강 유역에서 발견된 볍씨를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판명한 결과에 근거하는 주장이다. 실제로 금강 상류인 옥천군 대전리에서는 기원 전 3천 500년 것으로 판명된 볍씨가 밀 보리 기장 조 등과 같이 발견된다.

이처럼 금강은 인류에게 처음으로 쌀밥을 지을 수 있는 벼농사가 이루어지게 해준 은덕의 강이었다.

그런 금강이 부용산 자락에서 서남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흐르며 적시는 유역에 풍부한 문명을 꽃피우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그 결과가 어떠한가.

공주와 부여는 백제의 왕도가 되었고, 현재의 세종시는 천하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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