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 ‘민마루와 종촌동’

▲권오엽 명예교수.
▲권오엽 명예교수.

‘한밭’이라는 고유명이 있는데도 대전으로 부르는 일에 흔쾌히 찬동하지 못하던 나는, 민족의 명군 세종을 지명으로 하고, 거리나 동네의 이름도 순수한 우리말로 지었다는 말에 끌려, 구경 한번 온 것이, 세종시 종촌동에 살게 된 인연이었다.

제천을 앞에 두고 완만하게 높아지는 구릉지에 조성되는 단지에  ‘민마루’로 시작되는 학교들이 세워진다는 것도 이주를 결심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2015년 초에 입주해보니, 주소는 가재마을과 종촌동을 병기하는데, 학교의 이름들은 처음에 안내할 때와는 달리 ‘종촌’ 초·중·고등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입간판에 그려진 조감도에는 분명히 민마루 초·중·고등학교인데, 무언가 속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조사해 보았더니 민마루와 종촌의 의미는 유사했으나 유래는 크게 달랐다.

민마루의 ‘민’이 꾸밈이 없다는 뜻이고, ‘마루’가 높은 곳을 의미해, 민마루는 민둥산이나 민머리처럼 나무가 없는 구릉지로, 집을 지으면 만복이 들어오는 명당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뜻만 보자면 마루 ‘종(宗)’과 ‘마을 촌(村)’이 합쳐진 ‘종촌’도 마찬가지다. 우리말을 한자로 고친 것 정도의 차이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곳을 종촌으로 부르게 된 유래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만도 없다.

1910년에 조선을 강탈한 일본은, 1914년에 우리의 토지를 빼앗아 일본인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으로, 모든 땅을 신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본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은 신고하지 않은 땅을 몽땅 빼앗아,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민마루라는 마을 이름을 종촌으로 바꾸었다.

마루 종(宗)자는 뜻이 좋은 한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서 사용하는데, 그것이 일본과 엮이면 고약한 뜻을 가진다.

일본의 대마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은덕으로 먹고 살았는데, 그 대마도를 다스리는 대장의 성이 종(宗)씨였다. 그들은 조선의 은덕으로 먹고 살면서도, 틈만 나면 해적질을 하고, 왜구가 되어 방화 약탈을 하다 살인도 주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앞장서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 한양의 궁궐에 불까지 질렀다. 그래서 종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대마도 종씨들이 사는 마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일본은 분명 그런 의미를 알고 민마루를 종촌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 종촌은 세종시가 건설될 때까지,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종촌리로 사용되다가, 2012년 6월 30일에 남면 고정리 일부와 공주시 장기면 제천리 일부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세종시는 고유지명을 사용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이곳에는 ‘멍에두들’,‘웃말’,‘가재’,‘웃뜸’, ‘큰말’ 등과 같은 고유의 지명이 있는데도, 영역을 확대한 종촌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일본의 잔재를 98년간이나 사용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개운치 않다.

종촌과 병기되는 가재는 산골짜기의 맑은 물속 돌 틈에 살며, 사람들에게 쉽게 잡히는 희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안겨준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가재에 대한 추억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어릴 적의 아기자기한 추억을 회상케 하는 가재는 잘 남긴 지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마루도 남겨졌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민마루를 버리고 종촌을 선택한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한다.

세종시가 건설되게 되자 주민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떠나야 했다. 보상이야 받지만 정든 고향을 잃는 슬픔까지 보상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의 잔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촌이라는 지명은 꼭 남겨주세요.”
고향을 잃는 아픔에 몽니를 크게 부렸다 한다. 식민시대의 잔재인 종촌은 결코 자랑스러운 지명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선주민들은 그것을 남겨두고 떠났는데, 부작용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다.

이웃에는 ‘아름’, ‘다빛’과 같은 아름다운 교명을 가진 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 학생들이 종촌학교 학생들을 ‘촌 학교의 촌놈들’이라고 놀려댄단다.

촌보다 도시가 좋다는 생각에 근거하는 옳지 못한 놀림이지만 , 놀림을 당한 종촌학교 학생들이, 교명을 바꾸어 달라며 울어대는 바람에, 교명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한 번 정해진 이름을 교체하는 일은 번거로운 일로, 자랑스럽지 못한 지명을 남겨두고 떠난선주민을 탓하거나 일본을 미워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보다는 유래를 알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키우는 것이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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