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 ‘전월산 며느리 바위’

▲권오엽 명예교수.
▲권오엽 명예교수.

전월산에 오르면 금강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것이 보고 싶어 20분 쯤 걸어 오르면 며느리바위가 있는 곳에 이르는데, 아무리 보아도 며느리가 연상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곳에는 며느리 바위로 불리데 된 유래를 설명하는 간판이 서있다.

옛날에 마음이 고약하기로 소문난 부자가 있었는데, 심성이 곱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를 보게 되었다. 어느 날 백발 도승이 찾아와 시주를 부탁했는데, 시아버지가 스님의 바랑에 퇴비를 한 삽 넣어주었다. 그것을 며느리가 보았다.

 며느리는 마을을 벗어나는  스님께 쫓아가 시주를 하고 시아버지의 용서를 빌었다. 스님은 며느리에게

“내일 모래 뒷산인 전월산에 오르되 뒤를 보지 말고 정상까지 올라가시오.”

하고 일러주었다. 며느리는 노승이 알려준 그날 산을 올랐고, 오르는 중 천둥번개가 쳐서 마음이 매우 궁금했지만 참고 전월산 정상까지 다다랐으나, 시아버지 비명에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마을은 바다처럼 물속에 잠겨있었다.

바로 그때 뒤를 돌아본 며느리가 기이하게 바위로 변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며느리 바위라고 불렀으며, 바위 밑에서 지성으로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의 전설이다.

뒤돌아보지 마라, 열어보지 마라, 먹으면 큰 일난다 라고 조건이 붙는 전설들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일뿐이다.

그런 차이는 듣고 전하는 도중에 일부가 탈락되거나 덧붙여진 결과다.

나는 안내판의 전설을 읽고, 가던 길을 멈추고, 바위를 위아래 좌우로 돌며 살펴보았다. 지은 죄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시아버지를 구한 며느리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쪽에서도 며느리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며느리라면 쪽진 머리를 하거나 아이를 안은 형상, 아니면 시어머니에게 구박 받는 것으로 보이는 형상이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호미나 부지깽이를 들거나 물동이를 인 형상으로 보여야 한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며느리는 커녕 여인으로 볼 수 있는 구석이 없다.

비바람에 닳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며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으나 날카롭고 까칠하여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각진 바위에 또 하나의 바위가 얹혀 있을 뿐이다.

그래도 며느리의 흔적을 찾으려고 열심히 살펴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거북이나 자라가 물가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꺼비로 보이기도했한다. 옆으로 돌아서 보았더니 화성인처럼 보인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화성인처럼 보이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더니

“글쎄요, 구태여 말한다면 이티 같이 보이기는 하네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의‘이티’로는 보인다는 말을 하고 지나간다. 그렇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위쪽으로 올라가 내려다보았더니, 고개를 처든 독사처럼 보였다. 피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는 코브라가 연상되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연상되는데도 며느리의 형상은 연상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민들이 며느리바위로 불린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이것 저것을 생각하다, 이런 경우를 생각했다. 

과거의 그 어느 때, 윗사람을 존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옛날에, 전월산 자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칭송할만한  며느리,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시부모에게 정성을 다하다 불쌍하게 죽은 며느리가 있었다. 그 효성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영원히 칭송할 방법을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전월산에 있는 바위를 며느리바위라고 이름 붙이자.”

전월산을 올라가는 길목에 서있는 바위를 며느라바위라고 이름 붙이고, 그 바위에게 정성을 다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도승, 시주, 스님, 바랑과 같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불교가 전파된 이후에 만들어진 전설 같고, 전월산이 백제의 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4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 같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