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천광노 학당장
▲천광노 학당장

지난 총선에서 우리지역 세종은 더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컷오프한 이해찬 현 의원이 무소속 으로 출마해 8천이 넘는 큰 표차로 2위 새누리당 박종준 후보를 크게 앞서 당선되었다.

늦었으나 당선을 축하하며 축하하는 진심을 알기 바란다. 대한민국 정부청사가 들어서 제2의 도시격인 세종의 국회의원은 시민의 지지를 골수에 새겨 전국 253곳 그 어느 지역 국회의원보다 무언가 탁월한 정치 역량과 인품을 갖춰 국가와 지역발전에 헌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사실 말이다.

기대는 해도 선수가 너무 높은 7선이라 게으를 우려가 있다는 게 지지하지 않은 시민 중 몇 분의 말이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시민도 이해찬 의원의 지역구 시민이니 그들의 볼멘 평가가 택도 없을망정 귀를 기울여 감싸야 마땅하다.

또 말하기를 구시대 인물에다가 전직도 너무 높아 의원직은 그냥 장식으로 한다거나 아니면 은퇴용으로 하는 것이라거나, 또는 정부에 너무 예리한 각 세우고 칼날이 날카로워 세종시의 발전이 더디다고도 불만하더라.

이 또한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거나 공연한 비방이라 밀칠게 아니다. 귀담아 듣고 알아듣게 설명을 잘하는 게 의원직의 중요한 역할이다. 너무 빨리빨리 하고 욕심을 낼게 아니라 세종시 완성은 아직도 15년여가 남았고 진도는 빠른 편이라고 설득을 해가면서 마지막 소명이라는 자신의 말대로 잘하되 시민들과 소통을 두세 배 늘리기 요청한다.

아무튼... 정치관련 칼럼을 쓰면서 밟을수록 더 잘 자라는 보리밭 밟기 효과를 떠올려 본다. 이해찬 의원에게 무슨 문제가 있거나, 김종인 대표가 무슨 연유로 공천에서 잘라 세종시가 함몰하듯 정치풍향계가 역돌기를 하듯 망가진 현상이었는지는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건 세종시민의 선택을 염두에 두고 결정했어야 옳았다. 여전히 이해찬 의원에 대한 지지가 현격한 것하고, 당에서 보고 결정한 컷오프하고는 달랐다.

특히 전국 제2의 투표율을 나타낸 세종시는 누가 강제로 끌어낸 게 아니라 알고보면 이해찬 의원 지지현상이었다. 그러니 더민주당과 김종인 대표는 세종시민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복당해서 책임을 묻는다는 말은 세종시민의 지지의사를 꺾어버린, 그게 바로 무시현상이므로 당연히 싹싹빌고 잘못을 용서받으라는 건 의원이 받자는 게 아니라 유권자 시민이 받을 몫이라는 논리다. 이건 이해찬 의원 개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지지한 민의에 대한 응당한 당사자의 기본 예의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볼 일이다.

그러나 오늘 하려는 말은 앞으로의 복당 문제나 꼭 책임을 물으라는 쪽이 아니다. 정치의 본성은 국민섬기기라 할 때 섬김의 근본에는 인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며, 정치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여 그른 말이 아니라는 데 방점을 찍으려 한다. 물론 거물 정치경륜자에게 무례한 말같이 들릴지도 모를 소리지만 100수연 잔치라 하여도 덕담삼아 해도 될 말이 있는 법이다.

정치를 왜 하느냐에서 답은 국민의 삶에 자신이 앞장서 무엇인가를 받들어 잘 살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 정치의 본성이란 뜻이다.

장관이나 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이해찬 의원이 역임한 국무총리 역시도 국민 도우미가 본질이다. 교육부장관도 마찬가지고 시장 군수도 마찬가지로서 국민의 뒤를 돌보는 일이 주어진 소명이라는 점 재론이 필요 없는 말이다.

그런데 이건 뒷전이 된다고 보일 때 국민은 분노하지만 분노한들 저들이 뭘 어쩌겠느냐면서 화장실에서 갓 나온 자의 얼굴 바꾸기는 땅에서는 심판받지 않아도 저세상에 가면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반드시”라는 말은 어 하다 보니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이 낸 말의 전매특허처럼 굳어 버렸다.

배신의 정치는 국민이 심판해 달라고 하면서 액센트가 너무 강해 창백하고 분노에 가득찬 싸늘한 얼굴에 쇳소리까지 나면서 “반~다시”로 들렸다. 그러더니 이를 어쩔꼬.. 그 대가를 새누리당과 대통령이 자업자득 자승자박 종두득두 부메랑이 되어 말한 그대로 홈빡 심판을 되받고 말았다.

국민은 유승민이나 이해찬을 내치지 않았던 건데 이건 그들의 자질이 대통령이나 당에서 보고 판단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총선을 치룬지 꼭 한 달이 되는 오늘 지금도 세종시의 이해찬 컷오프와 대구 동을 의 유승민 타킷에 퍼부은 독화살은 한국 선거의 역사를 넘어 한국 정치사에 색다른 이정표를 높이 세웠다. 그야 뭐 그랬거나 말거나 이제는 이미 지나가 버린 총선이고 과정이 어떻든 이제와 되새길 이유가 뭐냐고도 하겠지만, 우리는 후대까지 갈 것도 없이 당대에 좋은 교훈을 받게 된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고 하는 순리와 민심이다.

그러나 순리는 자주 반발한다. 밟으면 밟혀서 죽어야 마땅한 듯 보여도 이게 청보리 처럼 밟으면 더욱 강해지고 뿌리가 잘 자라는 이상한 이치는 밟는데도 두 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으라고 밟는 발이 있고 청보리 처럼 튼튼하게 잘 살으라고 밟는 발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유승민이나 이해찬의 경우를 보면 죽기를 바라고 밟아댄 건데 밟은 발이 다친 격이다.

이래서 정치에는 금도가 있다. 잘를 경우가 있고 자르면 안되는 경우가 있고 밟아버릴 경우가 있고 밟으면 밟혀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데 유익한 경우도 있다고 하는 것으로서 이게 어찌 정치뿐이라 하겠는가. 답은 그래서 먼저 인간이 되라는 건데 대통령이 말한 배신은 자신에게 불출이요 배신인지 국민에게 불충이요 배신인지를 예민하게 가렸어야 옳았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이해찬이 독버섯으로 보여 잘랐다면 이런 눈은 시민이나 국민의 눈이 아니라 대통령이나 당대표 김종인의 눈이었고, 이런 눈을 일컬어 사용의 눈이라 하는 것이고 곧 악감이며 악독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악독이나 사욕이나 복수나 원한을 갚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하늘이 한다는 것이 성경이다. 이때의 하늘이 바로 국민이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 역묘장을 만들고 유승민이라는 씨앗을 일부러 키우느라고 짓밟은 것이 아니냐는 정치평론가들의 논평까지 나온다.

이해찬의 경우 역시 안 그랬더라면 지금 김종인의 위치는 보다 안정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인생사는 덕을, 인격을, 먼저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죽는 날까지 불변이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