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려 잠실에 도착했다. 청첩장에 인쇄된 결혼식장을 가기 위해서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는데 복잡한 지하 잠실역의 내부가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한참 망설이다가 기억을 되살려 팻말을 따라 표사는 곳을 찾고 이내 사람들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전동차 도착할 시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승강장을 메우고 있었다. 그 인파가운데 얼핏 스치는 한 남자의 안면이 낯설지가 않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에 대한 감정이 아직도 달갑지 않게 남아있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는 내 고루한 성격 때문일까.

삼십년도 더 전에 헤어져 이제는 잊혀 져간 남자와 오늘 우연하게 맞닥트렸다. 세상 물살에 수십 년 다듬어 졌다 해도 본래 마음 바탕이야 어디 가겠는가. 이순의 문턱에서 만난 젊은 시절의 인연이 반가워야 할 텐데 옹졸한 때문일까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미심쩍어 다시 뒤 돌아 보는데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그런데 그 역시 얼른 시선을 피한다. 나 역시 당신을 기억하지만 만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리라. 우리의 남은 인생길을 생각할 때 또다시 보게 될 기회는 없을 것이다.

70년대 초 어떤 사보에 포토 에세이를 게재하던 때의 일이다. 사회에 나와 시작했던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을 심각한 건강문제로 휴직하고 요양을 이유로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작품성 있는 사진과 함께 에세이 형식의 글을 기고하면 편집기자의 손에 의해서 한편의 영상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회사 홍보실에 편집과 취재를 겸한 여기자가 있었다. 그녀는 명문대학 신방과를 나온 재원으로서 매사에 활달한 성격으로 남자사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그녀를 포함한 나와 홍보실 직원 몇몇은 일과가 끝난 뒤 찻집에서 혹은 생맥주 집에서 우리들만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인가 동대문 밖 어떤 주점에 모여 70년대 문화와 예술에 대한 토론으로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질 때였다.

남가좌동 행 542번 일반 버스에 혼자 오르는 그녀가 안쓰러워 차 내에서 읽으라며 독서신문 한 부를 구입해서 그녀의 손에 들려준 적이 있었다.

훗날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그날 독서신문 하나로 해서 나를 대하는 그녀의 감정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선데이 서울’ 같은 대중성 있는 오락주간지가 주종을 이룬 밤 시간대의 가판대에서 그녀에게 권해준 교양과 전문성 있는 주간지 한 부로 해서 나는 그녀에게 꽤 수준 있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후로 내 글과 사진에 큰 관심을 보였다. 홍보실의 편집방향까지 바꾸어 가면서 내 작품의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하기도 했다. 소재선정에 대한 능력이 남다른데다가 편집회의 주도권을 늘 그녀가 쥐고 있을 만큼 꽤 능력을 인정받던 그녀였지만 일과가 한가한 중에는 틈틈이 털실로 뜨개질도 하고 있었다. 사원들은 그녀가 뜨고 있는 남자용 재킷의 주인이 누구일까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 겨울 특집을 편집하는데 봄꽃을 촬영해야 할 일이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날 그녀는 나와 동행하여 창경궁 식물원을 취재하게 되었다. 깊은 겨울이라 함박눈이 탐스럽게 내리던 날 유리 온실 안에 피어난 각종 봄꽃을 정성껏 촬영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원 앞을 걸어 종로 삼가 쪽으로 향하던 우리는 골목길 작은 찻집으로 들어갔다. 한적한 다방의 수족관 옆자리에 앉아 물고기의 날랜 유영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내게 말했다.

“내가 뜨는 재킷 주인이 누구일까 생각해 본적 없어?”
“글쎄... 나와는 관계없는 일 같아서 관심 없네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는데 그녀는 눈빛이 달라보였다.

“몰랐겠지만 실은 독서신문 선물에 대한 답례야 ”

독서신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읽을거리로 권해준 내 정서가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농담처럼 가볍게 시작된 그녀와의 관계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까지 짚어가며 향기로운 봄날을 향하여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만들던 옷이 완성되었다. 그날 저녁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일로 인해서 만날 수 없다는 전화를 받았다. 편집이 끝난 시점이라 내가 사무실에 들를 기회는 딱히 없어 그녀를 며칠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휴직중인 내 직장에 다시 출근해도 좋다는 주치의의 진단이 있어 나름대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털실 옷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 나를 위한 선물이라던 그녀의 뜨개질 작품이 나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겨울은 끝나가고 있었다.

계간으로 나오는 사보의 봄 호가 출간되었다. 그녀를 만났어도 털실 옷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이 겸연쩍기도 하고 듣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지난겨울 눈 속에서 피어난 온실안의 봄꽃만 화보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녀와 돈화문 근처 어떤 찻집에서 마주 앉아 그 겨울 재킷의 행방에 대해서 전말을 이야기 듣게 되었다. 재킷을 포장해 자리에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사라지고 말았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그 재킷을 입고 나온 한 멀쩡한 남자가 있더란다. 경리과에 근무하면서 이유 없이 홍보실을 드나들던 그자가 양복 속에 입고 있는 재킷을 본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내게 말하지 않았지만 후문에 의하면 직원들은 그녀가 손수 공들여 만든 선물을 줄 만큼 사랑하는 사이라고 인정하는 눈빛을 보냈고 어떤 이는 노골적으로 축하의 인사까지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떤 암시를 주었기에 그런 맹랑한 일이 발생한 것인가에 대하여 몇 날을 두고 추궁 했어도 그럴수록 우리의 관계는 점점 멀어만 갈뿐 관계 정상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를 위해 만든다는 정성어린 선물은 만져도 못 본채 그녀와의 관계는 끝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보에 게재 하던 에세이의 연재를 마치고 내가 살아가야할 본 업무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털실 재킷만 늘어지게 입은 채 아들딸 줄줄이 낳고 잘 먹고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훔쳐온 장물이 어디 그렇게 유용하게 쓰이던가. 인편에 들려온 소식을 말하자면 그녀는 홍보실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입장정리를 확실하게 하고 회사를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그 뒤에 그 남자역시 회사를 떠나서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문과 함께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내 청춘사업의 훼방꾼으로 등장했던 멀쩡하게 생긴 그 남자.

이제는 세월의 흔적에 많이 피폐해져 초라한 늙은이로 변모한 그가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쯤 살아온 시점에서 그녀를 만나게 될 우연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