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화 수필가
▲서대화 수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위층에 하얀 할머니가 사신다.

자그마한 체구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하얀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 댁은 중년의 아들내외와 손자 둘, 할머니까지 다섯이 한 가족이다. 그러나 직장으로 학교로 모두 나가면 낮에는 할머니 혼자서 집을 지킨다. 언제나 용모가 단정하고 말씀도 없는 편이라 우리는 늘 어려워하는 마음으로 대하며 지냈다.

어느 날 아침나절이었다. 바쁜 일이 없는 날이라 늦게 출근준비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다보니 그 할머니가 우리 집을 노크하신다. 우리도 팔십이 넘으신 노모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 어머니 친구삼아 잘 됐다싶어 반갑게 맞이해 안으로 모셨다.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두 노인께서 이런 인사를 나누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으신다. 그런데 곁에서 잠시 들으니 할머니 말씀에 일관성이 없다. 6.25때 피난 이야기를 하다말고 오늘아침 큰손자 녀석 늦잠 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젊어서 할아버지 바람 피우던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는데 비가 오려나 하면서 창밖의 푸른 하늘을 쳐다보신다.

친구삼아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 상대를 잘 하던 어머니도 조금 이상한 눈치를 느끼곤 노인의 거동을 유심히 살피신다. 잠시 후 할머니는 그만 올라가 봐야겠다며 일어나서 현관문을 나서다가 대충 짐작되는 행동을 하신다. 신발장 옆의 큰 거울에 비친 할머니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는 것이다.

“이 할머니는 여기까지 날 다라 왔네. 그만 집으로 돌아 가시유.” 라며 큰소리로 꾸짖는 것이다. 첨엔 누구 또 다른 사람이 밖에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할머니는 분명 거울속의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구나. 어쩌면 암보다 더 무섭다는데 치매로 고생하시는구나. 정갈하고 조용하시던 노인이었는데... 순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글쎄 이 할머니는 하루 종일 나만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군요” 하면서 거울속의 자신을 또 나무라신다. 우리는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고 웃을 수는 더욱 없었다.

그 후에도 할머니는 이따금씩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면 “이 댁 할머니 계세요?” 하고 놀러왔다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두서없는 이야기를 재미있듯이 나누다가 돌아가시곤 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당신 집으로 착각하고 우리 집을 찾아 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루는 퇴근길에 그 할머니의 아들 내외분을 골목 안에서 만났다. 며느리 되는 중년 여인이 먼저 내게 인사를 한다.

“저희 어머니 선생님 댁에 자주 가시죠? 얼마 전부터 치매기가 있으신데 이해해 주세요.” 그러면서 “아직은 그리 심한 편은 아니기 때문에 식사 준비나 그 외에 간단한 집안일은 무리 없이 처리 하신다” 며 내게 양해를 구한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자상하고 예절바르신 분이었다고 했다. 고향에서는 좋은 이웃이었고 자식들에게는 현명한 어머니로서 존경을 받았는데 노년에 이르러 이렇게 되셨다며 안타까워한다.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면서 그들의 아픔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도 노모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일인데다가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어 그렇게 살다가 가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너무나도 애처롭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오랫동안 오시지 않으면 궁금하기도 하고 안부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 앞 골목길에서든지 혹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이라도 만나게 되면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 안녕하셨어요?하고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그러나 알아보고 반가워 할 때도 있지만 어느 때는 ”댁은 뉘시유?” 하면서 무안을 주기도 했다.

기쁜 일 보다 근심스러운 일이 더 많은 곤고한 날들이었는데도 빠른 것은 세월뿐인가. 봄 여름이 지났다. 골목길을 지키고 서있는 내 나이쯤 된 은행나무 가지에 노란 잎 새 들이 흩날리는 깊은 가을날 오후에 정말로 오래간만에 하얀 할머니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 열어드리니 그 가볍고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은 안으로 들어오며 “이 댁 할머니 계세요?” 한다.

우리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잠시 망설인다. 사실대로 말씀 드리면 이해하실까.

비교적 건강하셔서 집안 대소사나 자식들 가정의 일상사 까지 관여하시던 어머니는 지난 삼월 초에 돌아가셨다. 급성으로 진행된 지병으로 두세 달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시다가 그렇게 되시고 여러 달이 흘렀는데 이제와 당신의 친구 되었던 우리어머니를 만나러 온 것이다.

“예, 저희 어머니는 멀리 따님 댁에 가셨어요.” 옆에 있던 아내가 얼른 대답하니 할머니는 알았다며 이내 되돌아 나가신다.

어머니 생전에 우리 잘못했던 일, 함께 즐거워하던 일, 병원에서 임종을 앞둔 고통 속에서도 찬송하며 기도하시던 일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메어지는데...

그래, 정말로 멀리 있는 딸네 집에 다니러 가 계신 것으로 생각하면 좀 위로가 될듯하다. 생전에 극진히도 사랑하고 사랑받으시던 따님이 둘씩이나 하늘나라에 가 있으니까.

하얀 할머니를 오늘 뵙고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또다시 그리워 되돌아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쓸쓸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내가 하지 못해서 지금 후회하고 있는 일들을 할머니의 아들 내외분은 알고 있을까. 아직 생존해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과 효도의 때는 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더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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