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일 사설

  ▲천광노 학당장
  ▲천광노 학당장

필자는 우리 ‘세종매일’을 준중앙지(準中央地)라 부른다. 아니, 준중앙지 격(格)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자의 자질이나 논설위원 주필이 그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고심하고 배워야 한단 말이다. 그런날 오려나? 그래서 쓰는 사설이기는 하여도 현실 가마득하지만...

“할아버지 정말이에요?” 초등학교 4학년 미소(박미소)가 서재를 들여다 보다 불쑥 묻는다. “정말 공자도 모르는 게 있다니 이 무슨 말이예요?” 느닷없이 이게 뭔소린가 생각하는 순간... “그럼~ 대통령도 모르는 게 있고 교수박사 총장도 모르는 것 많지~” 하면서도 많은 생각들이 감돈다. 청와대까지는 아니라도 총리실이나 장 차관이라면 대개 “내가 제일 잘 안다” 여기기도 하나 택도 없는 소리다.

‘허성도’ 중국통 서울대 명예교수가 14여 년 전, 출판사 ‘사람과 책’을 통해 출간한 “공자도 모르는 게 있고 장자도 후회할 때가 있다”라는 긴 제목의 그 책을 본 모양이다. “그 책 어디서 봤어?”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을 거쳐 G20정상회의에 참석 후 귀국길 기내에서 기자들과 30여분 면담을 했다는 뉴스가 뜨던 날이다. 이에 한 정치평론가는 퍼질러 앉아 국민과 만나주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때 “퍼질러 앉아...”라고 하는 바람에 방송용어로 부적절하다는 약간의 조정을 받기도 하자, “기자가 국민입니다~” 라는 대꾸를 하던 때다.

이 말도 수식한다. 그냥 신문사의 직원이 아니라 기자란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을 대변하는 그 자신이 곧 국민이라는 각색인데 대통령이 들으면 참 같잖다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던 중 기자도 모르는 게 있다는 생각도 했다. 많다는 생각 말이다.

논설위원도 모르는 게 있다. 허나 논설위원도 국민이다. 그럼 과연 기자가 국민의 대변자 맞나? 신문사가 국민이고 논설위원 주필이 과연 국민이라는 논리인데 답은 “글쎄올시다” 해야 하니 스스로 무안해진다.

실은 대통령이 국민의 대변자여야 하고 총리장관이 그래야 한다. 말이나 머리로만 국민- 국민- 하지 않고 국민의 가슴이어야 한다. 국민의 형편과 심정까지 같아야 한다고 뽑고 앉혀 혈세를 주고 맡겼으므로 기자보다 신문보다 윗자리에서 국민의 뜻을 살펴 아픔을 삭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 피차 모르는 게 많으니 탓해 무엇 하겠는가?

필자에게는 노년 최고의 친구가 네 명 있다. 미소, 현규, 웅경이, 희원이... 미소만 열 한 살이고 셋은 열 살이다. 55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깨보숭이 친구처럼 살면서 정이 들었다. 짝사랑이 아닌데 더 설명할 시간은 없고...

필자가 이 네 명의 친구 아이들에 해주는 대표 4자성어는 상위인지(上位認知)다. 영어로는 메타코그니션이라 하는 말로서 특허품도 저작권도 아니건만 마치 그런 양 아이들에게 으스대기도 한다. 안다는 사람들이 거의 잘 모른다는 것이 메타코그니션이다.

“100점은 50점”이라는 말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다. 자기네 반에서 1등이고 100점이라면 한국의 학교 숫자는 학생수만 700만명이므로 1개 반 수는 대충 잡아도 200~300만개나 되는 반(班)이 있다. 1등만 수백만 명이라는 게 메타코그니션이다.

세종시에서 1등이고 100점이면 전국에서도 1등에 만점 맞나? 그들만 모아보면 1등 100점 만점이 순식간에 10만등(等)으로 추락하고 만다. 한국을 넘어 지구촌 세계로 나가면 몇 등 일까? 70억 인구라면 우리반 우리학교 1등이 1억 등 1억등으로 전락한다. 잘한다고 뻐겨 봤자다. 어디서 까불고 있어?

상위1%라면 환장들을 하지만 진정한 상위1%는 다시 하위1%를 우려해야 하므로 99점부터 시작해야 금메달을 딴다. 육상경기에서 0.001초 줄이기 경쟁을 보면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은 공자 맹자 장자도 예외일 수는 없다.

결론은 최선(最先)이다. 최선이란 양심(良心)이다. 양심은 천심(天心)이다. 천심은 민심(民心)이다. 민심이 국민(國民)이다. 그런데... 국민은 5천만이나 되어 늘 자기 주관적 국민을 들고 요란을 떨어들 대는데 국민이란 무엇인가 보자. 내 편 내자식? 이건 동물의 세계에 흔코... 필자의 잣대이니 생각거리로 참고해 보라는 전제에서, 국민의 진정한 정의는 약자(弱子)라고 보는데 어떤가?

부자국민, 건강한 국민, 유식한 국민, 행복한 국민, 웃음꽃 피는 가정에서 사는 국민... 물론 이들 모두가 국민이고 이들 모두를 아전인수 국민으로 정의한들 아니라 하면 괜히 머리만 아프기 쉽다. 그래서 상선(上善)은 물이라고 한 장자가 말하는 국민. 맹자(성선설)가 말하는 국민, 순자와 한비자(성악설)가 말하는 국민도 다 국민 맞는 말인데, 필자가 말하려는 국민은 “잃은 양 한 마리”다.

아홉 아홉마리의 양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안고 돌아오는 목자를 보며 안긴 양이 자신이라고 믿고 신뢰한다. 봄날 아지랑이같이 많은 생각들이 아롱거린다. 세종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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