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근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

지금 한국은 싱글족, 나홀로, 솔로시대가 대세다. 그로 인해 연일 고독사가 증가한다고 걱정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다 호들갑스러울 뿐이다. 뭐 하나 길게 기억하고 오래도록 반성한 적이나 있던가. 이 또한 우리들이 진작부터 만들어 놓은 비뚤어진 인식의 결과이니 누굴 탓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혼자 사니 부담이 없다고들 말한다. 이것저것 거리적 거리는 것 없이 나 혼자 먹고 즐기면 그만이다.
 새끼 없으니 재산 걱정할 필요가 없고, 마누라 남편 없으니 눈치 보며 신경 쓸 일이 없고, 시부모 처가 식구들이 없으니 명절날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부담회피다. 책임지고 싫고, 챙기기 귀찮고, 떠맡기 힘드니까 그냥 자신을 억누르며 사는 것이어서 그렇다. 그러다 보니 효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가족이 없으니 효가 존재할 공간이 없는 것이다. 아예 부모에게서 재산이나 인성을 제대로 물려받거나 본받지도 못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재산이나 넉넉히 물려 받았으면 흉내라도 낼 테고, 인성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면 정성이라도 기우릴 텐데 말이다.

이는 효에 대한 인식의 잘못에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효는 보여지는 것에서 그 정도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효는 자연스레 부모를 모시고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이거늘, 그 효의 크기로 명예가 주어지고, 조세나 부역의 부담이 면제되고, 효자효부상이 얹혀져 널리 홍보되는 관행이 이어졌다는 애기다. 마치 부모를 모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얼마나 단속하고 자학하느냐에 따라 효의 정도가 책정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여창의 이야기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아버지 정육을이 이시애의 난 때 죽어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그 편모에 대한 효행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지극한 것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이질을 앓았다.

그러자 정여창은 향을 피워놓고 어머니의 아픈 몸을 자신의 것과 바꿔달라고 빌면서 그 아픔을 느끼기 위해 기둥에 머리를 마냥 부딪쳤다고 한다. 그 바람에 피가 적삼을 흥건히 적셨다.

이 얼마나 갸륵한 정성인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지극함이 배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과연 도학의 선구자다운 면모다.

하지만 오늘날은 조금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은 가업을 이어 생활을 연명하던 시대와 다르다. 물론 여전히 가업을 생업으로 이어오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취업을 해서 그 수입으로 생활을 연명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자학적인 고통공감만을 강요하는 효행은 오히려 효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살면서 자신만의 삶에 빠져 사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자학적인 태도로 부모를 섬기는 것 또한 좋은 본보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효는 현실에 맞게 이어져야 하고 계승되돼야 한다.

조선시대까지 좋은 풍습으로 이어져 오던 여러 가지 미풍양속들이 오늘날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알고 보면 지나친 구속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올바른 본보기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따르라고만 한다면 이 시대 어느 누가 호응을 하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작은 것부터 실천할 때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효를 너무 크게 잡지 말 것이다. 아주 작다면 작은 것, 나가면 나간다고 돌아오면 돌아왔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부터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하고 있다면 이제 일주일에 몇 번을 정해 놓고 문안 전화 드리는 것도 실천해 볼 일이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도 나가면 나가는가 보다, 들어오면 왔는가보다 하는 식의 태도나, ‘너 또 왜 자꾸 전화하니’하는 식의 태도는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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