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근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

한국 사회가 흔들린다. 최근 흥사단에서 조사한 초·중·고 아이들의 정직지수를 보면 분노가 일정도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10억원이 생긴다면 1년간 감옥행도 무릎쓰겠다’고 고교생 44%, 중학생 28%, 초등생 12%이 응답했다는 수치에는 몸서리마저 쳐진다.

물론 여기에는 장난 끼도 발동했을 수 있다. 사춘기에다 진지함이 덜한 세대니까. 그렇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에 대한 댓글들이다.

‘겨우 44%’라는 식의 비아냥거림이 더 많아서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어지는 응답은 쇼크 상태를 방불케 한다. ‘남의 물건을 주어서 내가 가져도 괜찮다’에 초등생 36%, 중학생 51%, 고교생 62%, ‘숙제를 하면서 인터넷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베껴도 괜찮다’에 초등생 47%, 중학생 68%, 73%가 각각 그렇다고 했다. 어쩌려고 그러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그나마 ‘시험성적을 부모님께 속여도 괜찮다’에 대해서도 각각 5%, 24%, 35%가 응답한 것에 대해 위안을 삼으라고.

돌이켜보면 말할 자격도 없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공직자들의 부패지수가 하늘을 찌른다. 위장전입, 탈세, 땅투기는 오히려 자랑스러운 본보기(?)다. 국민들도 의례 그러니 하고 자격(?)까지 부여해준다. 이미 아이들에게 본보기로 다 보여준 셈이다.

효는 참된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한고 그것이 본보기를 통해 축적되어져야 가능하다. 그래서 공자는 ‘부부자자(父父子子)’를, 맹자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예기’는 ‘부자자효(父慈子孝)’를 강조했다.

이는 부모와 자식 상호간에 도덕적 의무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설파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모를 섬김에 있어 물질적 봉양보다 정신적 자세에 훨씬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효에서의 참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거짓된 삶에서 진실된 효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기 때문이다.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천지의 이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어길 수 없는 도덕법으로 설파한 ‘효경’이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교과목으로 채택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최근 들어 심심찮게 들리는 말 중에 ‘현대판 고려장’이 있다. 서울 생활을 답답해하는 부모를 시골에 모셔다놓고 용돈만 온라인으로 꼬박꼬박 붙여주는 자식세대를 꼬집어서 나온 신조어다. 물론 어떤 부모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글쎄다.

한 아버지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뉴스에서 연일 반복적으로 보도되는 재산싸움 이야기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미리 자식들에게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해주고 가장 많이 받은 큰 아들집에서 얹혀 지냈다.

하루는 감기몸살이 너무 심해서 출근하는 큰아들보고 말했다. 나 데리고 병원에 좀 가자고. 그랬더니 큰아들은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출근해야 한다면서 3000원을 주고 병원에 다녀오시란다. 자식이 그렇게 말하는데 어쩌랴. 하는 수 없이 힘들게 병원엘 다녀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바쁘다는 큰아들이 조퇴를 하고 집에 오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다급하게 물었다. 네가 어쩐 일이냐고. 어디 아프냐고. 그러나 아들은 너무나도 쉽게 말했다. 강아지가 아파서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왔다고. 기가 막히고 화도 많이 난 아버지는 어느 날 아들이 퇴근할 때쯤 강아지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깜짝 놀란 아들이 아버지를 잡아끌며 물었다.

아버지 왜 그러시냐고. 아버지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강아지보다도 못하다고. 그러면서 자식들에게 분배한 재산을 다 회수했다고 한다. 그제야 자식들이 정신을 차렸다고도 했다.

왜 우리에게 참된 삶이 절실한 지, 그리고 왜 그토록 효를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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