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효교육원장 부근 최기복

자식에 따라 죽는 것도 차별을 두는 세상이다. 아들만 있으면‘싱크대에서 일하다 죽고’, 딸만 있으면 ‘효도관광 가다 비행기 안에서 죽는다’는 얘기가 있으니 말이다.

해묵고 한물 간 유머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의미만큼은 심장하다. 죽는 것은 매 한가지인데 다가오는 것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때 남아선호사상이니 뭐니 해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적이 있었다. 딸들은 이로 인해 한이 맺혀야 했고, 아들들은 부모 모시는 것을 당연시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효하면 양쪽이 다 머리를 흔든다.

마음이야 그럴 리 없겠지만 여유가 없는 지금의 삶에서야 오죽하겠는가. 더군다나 보여주고 가르친 것이 없으니 흉내를 낼 수도 없다. 효란 본시 보여주는 것에서 본받기 마련이다.

딸집에 들렀을 때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는 사위한테 하는 말과 며느리한테 갔을 때 역시 설거지를 하는 아들에게 하는 말이 달라서야 되겠는가. 누구의 아들이면 또 누구의 사위이고, 누구의 딸이면 또 누구의 며느리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촌년과 살겠다’는 이야기가 남우세스럽지 않다. 장인 덕에 중소기업의 CEO가 된 아들이야기다. 친어머니는 서른아홉에 나를 낳다 돌아가셨다.

아버지 손에 들려진 채 암죽과 분유로 때로는 동냥젖으로 살았다.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1년 후 지금의 어머니를 맞이했다. 15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금슬이 좋았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백지장 같은 얼굴로 서럽게 우셨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어머니는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나를 부르셨다.

젖먹이인 나를 기르면서 기른 아이와 낳은 아이를 차별할까봐 동생을 낳지 않으셨다면서 “순섭아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대학에 보낼거구, 그리고 엄마와 살거다” 하신다.

 어머니는 그 후로 한 번도 웃으시지 않으셨지만, 공과금을 거른 적이 없었고, 밭일을 도울라치면 험악한 눈까지 뜨셨다. 내가 서울 대학에 합격하던 날 어머니는 나를 이끌고 아버지 묘를 찾았다.

어머니가 우시는 모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소나무 등걸 같은 어머니의 손도 보았다. 군에 입대할 때도 어머니는 아버지 묘를 찾아 절규하듯이 말했다. “여보 순섭이 너무 멋지지 않아요”

젊은 나이에 장인 회사에 취직이 되고 장인에게 발탁이 되어 예쁜 아내와 회사도 하나 얻었다.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를 보고난 뒤 아내에게 모실 것을 강권했다.

아내는 자문을 받을 요량으로 친정에 갔다. 장인은 찬성, 장모는 반대였다. 못내 마땅치 않게 여기는 아내에게 차근차근 준비를 시켰다. 안방도 내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모시러 가자 어머니는 아내를 꼭 보듬어 안아주셨다. 그러나 어머닌 손사래를 치신다. “나 가면 느그 아버지는 어쩌려구? 나 절대 못 간다. 아니 죽어도 안 간다. 손자 녀석 생기면 그때 보러 갈게” 완강하시다.

아내가 슬그머니 보자고 한다. 여기에서 사시게 하면서 우리가 자주 찾아뵙고 용돈이나 많이 보내드리는 게 어머니를 편하게 하는 거란다. 할 수 없이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면서 아내에게 단단히 지시했다. 생활비 중 1/3은 꼭 어머니에게 송금하고 날짜 어기지 말라고. 그때서야 아내는 환하게 웃었다.

아내는 기업인의 딸이라서 그런지 꼬박꼬박 가계부를 썼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내의 가계부를 보게 됐다.

‘7월 15일 촌년 100만원’어? 촌년? 무슨 돈이 이렇게 빠져 나갔지. 전월 동일자도 똑같이 지출 난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순간 가슴이 콱 메어왔다. ‘이, 이 여자가 어머니를 촌년이라고’ 기가 막혔다. 나는 아내를 다그쳤다. 그리곤 시골로 내려와 버렸다.‘도시 년아 너는 도시 놈 만나 살아라. 나는 촌년하고 살란다’를 되뇌면서.

이제는 하나 둘 밖에 낳지 않으니 사위는 장인 장모에게 아들이어야 하고, 며느리는 시부모에게 딸이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효는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아울러 양성평등이라는 것도 쉽게 풀릴 법하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