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얘들아, 깡통 돌리러 가자

                          ▲장승현 작가.
                          ▲장승현 작가.

19 시골 학교로 전학 간 성욱이

10여 년 전에 루소의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땐 별 목적 없이 그냥 읽던 책들인데 그때 기억나는 것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큰 화두였다. 그래서 현재는 이렇게 시골 고향까지 보따리 싸고 내려와 정착한지도 모른다.

대전 살다 이곳 시골에 정착한 지 벌써 6년 정도가 지났다. 

고향 땅에 목조주택으로 집도 짓고, 아내도 학원을 차려 조치원댁이 다 되어 가고, 아이들도 처음에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도둑고양이가 무서워 울고불고 난리더니 지금은 도둑고양이만 보면 때려 잡는다고 쫓아다닌다. 

촌놈들이 다 된 것이다. 

한때는 자연농법을 실천한다고 농사도 지어봤고, 시골사는 재미를 느껴보려고 바둥대기도 했다.

‘처음 시골학교에서의 실패’
처음 이사 왔을 때 큰아들 성욱이가 다섯 살 정도였다. 

그때는 대안학교에 관심도 많았다. 후배들이 모여 대안학교에 대한 고민들을 할 때 옆에서 참여해 보고 싶어 훈수도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도 했었다. 

그런데 이사 온 우리 동네 근처의 학교는 30여 년 전에 내가 다녔던 모교로 연서초등학교라는 아담한 학교였다. 요즘은 전교생이 60여 명밖에 없어 폐교가 되니마니 하지만 내가 다닐 때는 그래도 600명이 넘던 곳이었다.

처음엔 성욱이를 이 학교 병설유치원에 보냈다. 연서초등학교 학생들은 학년별 10여 명씩 있는데 성욱이가 다니던 때는 전체가 12명이었다. 

성욱이 또래는 없고 성욱이 1년 선배만 5명 정도가 있었다. 처음엔 형 아들을 따라 친구 겸 형으로 잘 지내더니 나중에는 형들한테 치여 어느 날 갑자기 성욱이가 죽어도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자존심 강한 놈이 형들 밑에서 치이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내 피아노 학원이 있는 조치원 읍내로 나가게 되었는데 조치원 읍내 초등학교는 연기군 전체 학생 수의 반이나 될 정도로 큰 학교였다.

‘적응하지 못한 읍내 학교 생활’
성욱이는 3학년에 올라가야 한다. 읍내까지는 8km인데 아내가 아침마다 태워다 주고 수업이 끝나면 학교 주변 아내 학원에서 놀다가 엄마가 끝나는 시간에 같이 들어온다. 

읍내 학교는 현재 공부 과열로 학부모들이 난리였다. 

2학년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 벌써 몇 등이니, 누가 공부를 잘하니, 공부에 관심이 없는 우리들도 되레 성욱이가 다른 아이한테 떨어지면 화가 났다. 성욱이도 몇 번은 1등을 해봤지만 그 과열이 부모들한테는 욕심을 만들어 주는 당근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 점수 매기는 방법이 참 알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성욱이가 공부는 전체에서 서너 개밖에 안 틀려도 무슨 생활 평가인가 뭔가 주관적인 평가가 거의 반을 차지했다. 

그것 때문에 선생님과 아이가 갈등이 심했다. 성욱이 불성실하다고 엄청 혼났다. 성욱이가 장난이 좀 심하고 수업 시간에 떠든다고 선생님한테 맞는다는 이야기가 몇 번 들렸다.

그래도 우린 학교에 한 번도 안 찾아갔는데 그러다 한 번은 선생님한테 호출당해 학교에 불려갔다. 뭐 부모가 그래서 아이가 수업 태도가 안 좋다나. 하여튼 그런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60이 넘으신 나이 드신 선생님이신데 애들은 맞아야 교육이 된다는 엄하신 선생님이었다. 이렇게 성욱이는 큰 학교에서 적응을 못했다.

신학기가 되어 고민을 시작했다. 처음 유치원을 다녔던 연서초등학교에는 성욱이가 좋아하는 잔디운동장도 있어 마음껏 뛰어놀아도 혼나지 않을 것 같은 학교였다. 우리 동네에서 이곳에 다니는 친구도 두 명이나 있었다.

여기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거의 내가 알고 있는 친구, 후배들의 자녀고 그러니 성욱이도 거의 다 잘 아는 아이들이다. 학교가 전교생이 60명이니까 선배든 후배든 다 같이 친구가 되고 함께 어울리는 학교였다.

‘다시 연서 초등학교로 돌아오다’
시골로 이사 와서 성욱이를 이 학교로 보내고 싶었는데 아내의 성화 때문에 읍내 학교로 보내게 되었다. 

내 친구 딸내미, 지금은 여고생이 됐지만 이놈이 자기 딸을 자랑하는데 전교에서 매일 일등 한다고 했다. 

처음엔 대단하다고 했는데 글쎄 전교 8명 중에 1등이라고, 그리고 꼴통 아들이 공부를 안 해도 10등 안에는 꼭 든다고, 자기네 자식들은 지 애비를 닮아 머리가 좋다고. 그런데 자기 아들네 반은 10명이라고 했다.

성욱이 전학이 완료되었다. 요즘 전학은 전학 가는 학교 관할지역에 주민등록을 옮겨놓고 학교에 신고하면 된다. 

그러면 전학 갈 학교에서 예전의 다녔던 학교로 통보해 주면 끝이다. 그런데 예전에 다니던 읍내 학교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신학기 배정이 끝났으니 우선 신학기 배정이 끝난 이후에 전학을 가라고 했다. 행정 편의상 자기들의 편리만 생각하지 아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볼 것 없이 전학을 시켰다. 
아니 전학을 하려면 애가 신학기가 될 때 전학을 맞추면 좋은데 그런 배려는 없이 자기들 행정 편의만 생각하는 게 참으로 화딱지가 났다. 

그러니 학교가 초등학교 1·2학년이 되어서도 학력 경쟁만 시키고 거의 서울대에 다 들어갈 아이들처럼 경쟁만 유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친구가 죽어 초상집에 갔더니 벌써 성욱이 소문이 났다.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꼽아 보니 학부모가 된 내 중학교 친구들이 4명이나 있었다.

구들이 환영회를 해준다, 학교 운영위를 들어오라, 연서초등학교가 인원이 작아 너무 좋다, 선생님들도 좋은 분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이젠 우리 학부모들끼리 모여 재밌게 살아보자, 벌써 학교 교장 선생님이 우리가 전학 온다고 좋아하신다고 했다.

한가한 봄날 오후, 연서초등학교를 찾았다. 

봄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했지만 중학교 동창이 학교 소사로 와 있었다. 

성욱이와 동생 성안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공을 빌렸다. 아이들이 세상에 부러운 것 없고 내가 어렸을 때처럼 아무 걱정 없이 그야말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런 아이들한테 학원이니, 영어니, 벌써부터 그런 중압감이 많은 곳으로부터 해방 시켜준 일이 참 잘된 것 같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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