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사라져 가는 풍경들

▲장승현 작가.
▲장승현 작가.

12 나의 복숭아밭

내가 도회지로 나갔다가 다시 시골로 귀농한 게 15년 만이었다. 

옛날 이곳 시골에서의 기억은 복숭아밭에 대한 추억으로 이어진다. 

우리 집은 논은 한 뙈기도 없고, 밭이라고는 이 복숭아밭과 고추밭 조금이 전부였다. 시골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처럼 땅없이 7남매를 키웠다는 게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니까 거의 두분이 품팔이를 해서 7남매를 공부 가르치고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때는 집 뒤에 멀리 떨어져 있던 산밑에 복숭아밭이 있었는데 동네에서 과수원이 있는 집은 우리 집이 유일했다. 

비오는 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비 맞은 풀밭을 밟으며 복숭아밭으로 향했다. 

그 중에 제일 빨갛고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를 하나 따 먹으면 고팠던 배가 볼룩하니 나왔고, 덜 익은 복숭아 몇 개를 물장난하기 위해 챙겨야 했다. 복숭아밭에는 어설픈 원두막도 있었는데 모기장 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 동네는 무릉도원이었다. 

지금의 고복저수지가 막히기 전에는 투명하리만큼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산 모퉁이 경치 좋은 곳에 주막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잠시 들렀다 마시고 가는 우물은 10여 미터 아래에서 두레박으로 퍼올리는 물로 지금의 냉장고 물보다도 더 시원했다. 

찌르르르 찌르륵, 매미 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하는 아름드리 버드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다 더우면 바위 밑 낭떠러지 시냇물로 다이빙을 해 뛰어들곤 했다. 

이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배꼽에 침을 발라야 했다. 심장마비 때문이라나. 

입술이 시퍼렇게 변할 때쯤이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양지 바른 바위 위에 몸을 말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곳 시골로 귀농하자마자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 복숭아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버려지다시피 한 종중 땅에서 땅도 파헤치지 않고 나무를 한 120그루 정도 심었다. 

심은 지 3년 되어 가지만 아직 소독 한 번 안 해보고 거름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그동안 나무가 20여 그루 죽었는데 난 자기들 팔자라고 생각했다. 

산에서 사는 나무들처럼 생존할 놈들은 튼튼하게 살아남아 열매를 맺을 테니까. 

거름도 풀이나 열심히 깎아 깔아주면 그만이었다. 원래 산에 있는 나무들도 자기 잎들이 썩어 거름이 될 뿐이니까. 

올해도 복숭아가 많이 열렸다. 어머니는 한 뼘에 하나씩 복숭아를 많이도 매달아 놓았는데 난 한 가지에 한 개씩만 매달고 다 솎아 버렸다. 

나뭇가지가 약하고 아직 나무를 더 키워야지 열매만 따먹을 욕심이면 나무를 제대로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병충해 때문에 많이 따먹지 못했다. 

늦 복숭아라 매달려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까 병충해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아서였다. 

얼마 전에는 나와 비슷하게 자연농법을 고민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소독을 하나도 안 해도 70%는 상품화할 수 있다고 했다. 

자기가 매년 사과와 배를 농사짓는데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복숭아에 봉지를 씌어 얼마만이라도 병충해나 까치로부터의 공격을 덜 받을 수 있다는 귀한 충고까지 해주었다. 

가을에는 죽은 복숭아 나무 자리에 올복숭아를 심고 자두 나무와 매실 나무도 몇 그루 심어야겠다. 늦 복숭아만 기다리다 보니 꽤 지루하다. 

내년에는 씻지도 않고 그냥 입으로 베어 먹을 수 있는 오염 안 된 과일들을 골고루 따먹는 재미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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