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이름은 순교자이다!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19세기말 조선에 전해진 개신교는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일제 강점기의 순교자들은 신사참배의 강요에 맞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며,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왔다. 그리고 민족분단과 6.25 전쟁의 비극 속에서 순교자들은 이념의 대립을 넘어선, 사랑의 기독교정신을 실천해 왔었다. 

즉, 교회를 지키고 교인들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생명을 내어놓은 목회자들의 순교 정신은, 모진 고문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순간까지도 “주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고 외치던 그들을, 우리들은 순교자라고 부른다. 

이들의 고귀한 순교 신앙을 기리기 위해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재단’이 경기도 용인시에 ‘한국 개신교 순교자 기념관’을 세우고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다. 

이 기념관에는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즉, 일사각오의 유산을 후세에 물려준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260여 명의 순교자들이, 이곳을 방문한 순례자들에게 감동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그들 중에는 세종시의 조치원성결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순교한 김동훈 전도사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기념관 2층의 디지털 인명록에는, 김 전도사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감옥에 갇혔던 요셉에 비견되는 인물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는 1897년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나, 경성 성서 학원을 졸업한 뒤, 1928년 3월 조치원성결교회 2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사역하다가 7개월 만에 하늘의 부름을 받고 말았다. 오호통재로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는 대쪽 같은 성품으로 한 여인의 유혹을 뿌리쳤으나, 그 여인의 무고로, 그 지역 깡패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하고, 죽음을 맞으면서도 절대로 소송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그들을 용서해주었다.
 
그 용서는 예수님의 사랑이었기에 가능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순교 신앙은 그 당시 조치원 지역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도 남았다고 한다.
당시의 기독교 월간지 ‘활천’에는 김 전도사의 죽음은 조치원 지역 교계의 연합을 이루고 신자와 불신자를 하나로 묶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들은, 그의 사랑에 감복해 모두 교회에 다니며, 믿음의 명가를 이루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의 순교적인 신앙은 조치원성결교회에 큰 영향을 끼쳐 지금까지도 성도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즉, 순교자의 피로 물든,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 용서와 순종, 섬김과 봉사 정신이 작금에 이르기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로,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말이 있듯이 순교자의 뒤를 이은 천세봉 목사는 구국운동을 하다가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수 차례 구속되기도 했고 결국 일제로부터 당한 고문 후유증에 평생을 시달리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특히, 근래에 이르러, 불후의 명설교로 기독교계에 우뚝 선 목회자가 등장하였는데 바로 최상희 목사이다. 

그는 서울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본 교회에 부임하여, 교회 부흥과 교세 확장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순교자다운 성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조치원 시내의 정동에서 서창동 지역으로 교회를 신축 이전하면서, 인문학적 리더십과 추진력을 십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늘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해주셨다는 말로 늘 겸손함을 대신하였다. 

자신의 후임자를 선택할 당시에는, 성서가 쓰여 진, 이스라엘에 가서 유학을 하였고, 미국의 명문 달라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 문과대학 히브리학과 교수로 근무하던 최명덕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하기 위해, 3년이나 앞당기며 은퇴를 선언한 그의 기지는 명불허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었다. 

또한, 은퇴 후 후임자와 성도들에게 짐이 될까봐, 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는 충남 아산시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사모님의 귀띔도 순교자와 다름없는 동역자임에 틀림 없었다. 

지금은 조치원성결교회 원로목사로, 절기의 설교 중에 ‘돌이켜보면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었고, 눈물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그의 진솔한 고백에서 이 시대의 순교자를 본 듯하여 숙연해지기만 한다. 

그렇다! 그가 뿌려놓은 밀알 덕분에, 오늘도 많은 양(羊)의 무리들이 이 ‘순교성지교회’를 섬기고 있나 보다! 

세례교인 850명 모두가 순교자의 후예들이기에,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말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조치원성결교회, 이곳은 늘 생명의 말씀과 인간이해가 있는 거룩한 성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대 이름은 순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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