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사라져 가는 풍경들

07 볍씨, 직파를 꿈꾸며

                  ▲장승현 작가.
                  ▲장승현 작가.

아침 일찍 팔순이 가까운 동네 형님이 문을 두드리고 야 단법석이셨다. 

“오늘 씬나락 넣어야지. 싹이 다 텄어.”

시골로 이사 오고 나서도 우리 집 생활 구조는 아직도 도시생활 구조였다. 
해가 창문 밖으로 치밀어 올라도 도시로 출근하는 아내와 사무실을 나가는 나는 매일 늦게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처음 이사와서는 살가운 동네 사람들이 새벽 6시만 되면 마실을 오는 바람에 거의 파자마 바람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지금에야 동네 사람들이 잘 알기 때문에 최소한 8시는 넘어야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신다.

3일 전에 볍씨를 물에 담그고 소독약을 풀어 놓고 보온 덮개로 씌워놓고 싹을 틔웠다. 계획한 날짜는 내일이라 주변에 농사를 배우겠다는 고급인력들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라리가 농사는 무슨 농사여, 배우기는 뭘 배워…….”

그분들이 나를 아무리 무시해도 벼농사만 3년째다. 

여기 시골로 들어오기 전에는 대전에서 배 과수원을 3년 동안이나 하며 워밍업을 했고, 고향에서 대전으로 나가기까지 지게질을 하며 컸으니까 그 분들한테 큰소리를 칠 만은 했다. 

우선 볍씨를 골라 물에 담그고 소독약을 풀었다. 

소독약은 아직 내가 모르니까 동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하지만 빨리 볍씨 종자를 토종으로 개발해서 이 공정을 없애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삼일 정도를 담그어 놓다가 볍씨를 꺼내 보온덮개로 덮어 싹을 틔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하는 일은 싹이 난 이 볍씨를 꺼내 모판에다 흙을 넣고 볍씨를 담아 모판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사 와서 농사 짓는데 동네 어른들이 볼 때마다 훈수였다. 

왜 ‘논또랑’은 안 깎냐, 소독을 해야지 심어만 놓으면 먹는 줄 아냐, 왜 그렇게 논에는 피가 많냐, 그렇게 게을러서 농사를 짓겠냐 등등. 얼마 전 서울에서 내려온 초보자 선배 농사꾼마저도 날 훈시했다. 

사실 작년과 재작년은 주변에서 말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의 압력은 대단했다. 
특히 소독을 안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를 멸시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냅둬요. 벼야 심어만 놓으면 먹는 거지. 뭘 그리 걱정이 많아요?” 

사실 내가 작년에 벼를 심어놓고 논에 가본 것은 장마철 태풍이 오고 어머니가 하도 성화셔서 하는 수 없이 갔던 것뿐이다. 그나마도 우렁이만 잔뜩 잡아다 소주 안주로 먹었다. 

어머니가 하도 폐농했다고 해서 그래도 조금은 걱정되어 가봤더니 우리 논은 멀쩡하고 남의 논만 다 쓸려 나갔었다. 

“엄니두 참. 남들한테 욕 얻어먹어요,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 우리 논은 멀쩡하잖아요?”

사실 우리 논은 농약을 안 하고 비료를 안 주어 그런지 다른 집 벼보다 튼튼해 보였다. 

가을에 매상할 때도 농협 창고에서 검사관들이 검사를 하는데 동네 형님들이 나를 가리키며, “쟤는 농약을 하나도 안했어요. 무공해 쌀이라고요!” 하며 놀려댔다.
 
검사관들은 “농약을 안하면 덜 날 텐데. 근데 쌀은 깨끗하네요.” 하며 1등급 도장을 팍 박았다.

올해는 우선 대둔산 자락 밭에다 한 100평 정도를 실험적으로 직파를 해볼 참이다. 

주변에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자연농법인 직파에 무경운, 무농약, 무비료로 직접 몸으로 부딪쳐 볼 생각이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밭에다 벼를 심었다.

농약도 없었고, 비료도 없었고, 경운기나 트랙터도 없었다. 그렇지만 단위 면적당 소출량을 생각하다 보니까 농약이 생기고, 수경재배가 도입되고, 비료가 생기게 된 것이다. 

아직도 산간 지역이나 전라도 지역에서는 밭벼가 내려오고 있다. 
농사 원가의 50% 이상이 들어가는 기계나, 농약값, 비료값 등을 없애고 땅에다 그냥 씨를 뿌리면 이 원가는 절약이 될 텐데 말이다.

그냥 벼가 알아서 크고 인간은 수확만 하면 되는 자연농법을 꿈꾸며, 오늘은 하는 수 없이 모판에 흙을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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