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과 간신(姦臣) 유자광’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남이(1441~1468)장군의 아버지인 남빈은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의 딸 정선공주와 의산군 남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남이는 세종대왕의 조카가 되고, 수양대군인 세조와는 고종사촌간이다.

이렇게 화려한 배경에다, 실제로 귀신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던, 남이는 16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18세에 이시애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정벌하고 일등공신이 되어, 27세에 병조판서가 된, 조선 역사상 보기 드문 인재였다. 

그가 무술을 닦던 청년 시절, 동네 친구들과 연 날리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하녀가 광주리에 감을 이고 가는데, 감 위에 분(粉)을 바른 요귀가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저 감을 먹는 사람은 죽겠구나.” 생각하고 그 하녀를 따라, 집안에 들어가 보니, 주인집의 낭자(娘子)가 금방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 낭자의 목을 누르고 있는 요귀를 보고, 남이가 호통을 치니, 요귀는 소스라치듯이 놀라며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이 낭자가 바로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좌의정 권람의 외동딸이었다. 
당시의 권람 대감은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를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세조의 싱크탱크인 장자방이었다. 

남이 장군의 용맹스러움은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으나, 애석하게도 그의 나이 28세에,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은, 아버지인 세조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남이와 비교 당한 시기 질투가 있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조선 최고의 간신인 유자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자광은 무능했던 예종을 앞세우며,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특히, 자신을 병조정량으로 천거해준 남이 장군도 제거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남이 장군이 남긴 북정가(北征歌)는, 그 당시에 가히 절창(絶唱)이었건만, 오히려 그것이 화가 되리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리라. 사내대장부 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훗날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라는 시(詩)를, 

간신 유자광은 ‘사내대장부 나이 이십에 나라를 취(取)하지 못하면 …!’이라고, 몇 자 고쳐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는 것처럼 교묘히 엮어버렸기 때문이다. 

국문장에 끌려 나온 그는 심한 고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하게 된다. 
그곳에 있던 신하들은, 그가 죄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도 진실을 변명해주는 자는 없었다. 

특히 그 문구 자체가 위조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던, 영의정 강순도 자칫 자신에게 미칠 화가 두려워 이를 완강히 외면하고 있었다.

남이는 내금위 군사들이 가하는 호된 고문에, 온몸의 살이 터져서 더 이상 살아날 수 없게 되자, 영의정 강순과 역모를 꾸몄노라고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결국 그와 더불어 영의정 강순을 비롯한 많은 대신들이 역모 죄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 광경을 간신 유자광은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희희낙락하고 있었으니,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아까운 인재가 무고한 모함에 의해 희생되자, 그의 원혼을 달래 주고자, 그 시대의 토속 신앙인들이 단군과 함께 가장 많이 받드는 신이었다고 하니, 그의 초인간적인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명약관화하다. 

그의 이름을 딴, 남이섬은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그곳에 있는 그의 묘는 가묘(假墓)이다. 

즉,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한, 그의 시신은, 조선천지 사방으로 흩어져 가는 바람에, 어느 한 곳에 매장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난히 우리 민족 중 일부는 예나 지금이나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에 능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이르기를 요즘도 “유자광 같은 간신들이 온 천지에 깔려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기만 하다. 

즉, 사법 리스크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이라는 자와 그의 무리들이 온 나라를 뒤흔들어 대고 있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이재명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 부결이 되었느냐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검수완박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지난 23일 기각당하였다고 해서, 결코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재명이란 자의 측근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다섯 명이나 죽어나갔는데도 남의 일인 양 외면하고 있는 그의 후한무치에 치가 떨릴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 정치계의 동지로, 또는 공직자의 상·하 관계로 볼 때, 그들만의 세계가 유독 유별난지는 몰라도, 자타가 인정하는, 공인과 다름없던 자들이 조건 없이 목숨을 내던졌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사실, 네 명이 죽어나갈 때까지만 해도 의리, 배신, 불명예, 수치심 또는 검찰수사의 압박감과 가족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랬을 것이라고 가볍게만 여겨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재명의 경기도지사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고) 전형수의 유서에 담긴 내용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재명 대표를 향해 “이제 정치를 내려놓으십시오. 검찰 수사 관련 본인 책임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이 대표님과 함께 일한 사람들의 희생이 더 이상 없어야지요. 공무원으로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검찰수사는 너무 억울하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반복한 것으로 알려져,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사법부의 심판보다 인간이 먼저라는 것을, 국회의원 나리들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 오늘날의 간신들은 헌법 위에 군림하는 자라고 하니, 혹시 당신들 보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역사 앞에 온전할 수 있도록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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