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호통재(嗚呼痛哉)로다!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평소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중시했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지, 어느새 3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충남 홍성 출신인, 그는 양정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재학 중이던, 1974년 행정고시(15회)에 합격했다. 경제 기획원 사무관으로 일하다 경찰로 옮겨 최연소 경찰서장(31세) 최연소 경무관(39세)을 하였다. 1995년 2월 충남지방경찰청장을 끝으로 경찰을 떠난 이 전 총리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충남 청양. 홍성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었다. 
1998년에는 김종필 총재가 이끌던 자유 민주연합에 입당해 대변인과 원내총무에 이어 원내대표를 지냈다. 

이 전 총리를 두고 과거 JP는 번개가 치고 나면 먹구름이 올지 천둥이 올지 아는 사람이라고 했고, 박태준 전 총재도 철두철미 한 사람이라고 하여 세간(世間)의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이 전 총리는 정치인들의 꽃으로 불리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충남도지사에 당당히 당선되며, 충청권 대표 정치인으로 급부상하였다.

이 시절 그의 기지(奇智)는 절정에 이르렀다. 
행정부지사에 행정의 달인 최민호를 정무부지사에 정무의 귀재 김태흠을 임명하고, 강한 충남을 이끌어가던, 추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 하고도 남았다. 

그래서일까! 당시에, 그를 추종(追從)하는 완사모 회원들이 15,000명이 넘었으며,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활동을 하였는데, 국내 정치인중 제일 많은 회원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2009년 세종시 설치법에 근거한 9부2처2청을 옮겨, 세계적인 명품도시를 만들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이명박 정부가 기업도시로 수정하자, 그에 반발하여 도지사직을 6개월이나 앞당겨, 지사직을 사퇴하겠다는 기자회견을 국회에서 하고, 다음 날 충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할 계획이었다.

이때 도청에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눈물로 사퇴철회를 요청하자, 본인도 감정이 복받쳤던지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충남도청광장은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이어 사퇴 기자회견은 서류로 대신 이어졌지만, 그의 약속으로 인하여 충남도민뿐만 아니라 대전. 세종. 충북도민을 한곳으로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우리들은 늘 이 전 총리에게 마음의 빚이 남아있다는 어느 세종시민의 솔직한 고백이, 예사롭지 않게 들려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즉, 이는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듯이 그의 삶은 늘 자기성찰(自己省察)과 희생의 점철이었다. 
전직 국무총리로서 국민장과 현충원에 안장할 수도 있었지만, 평소 그의 지론에 따라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조문객의 부의금도 정중하게 거절하며, 이전부터 집안의 애경사에서 취했던 동일한 행위였다고, 정치(政治)의 상주(喪主)들인 좌의 최민호. 우의 김태흠. 리틀 이장우는 말끝을 흐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의 두 눈은 젖어 있었다. 

이 전 총리는 마지막 유언으로 “우리 국민들 모두가 행복했으면.....”을 남긴 채 황망히 떠나갔지만,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 인간 이완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에 대해서, 조그만 비석 하나만 세워주면 좋겠다.”고 살아 생전에 가신(家臣)들에게 늘 언급하시던 말씀이, 한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는 죽어서도 역시 ‘이완구’다운 면을 보였다. 
매사에 상투적인 허례허식(虛禮虛飾)보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어떤 형태로든 남에게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 소신이 유별나게 강했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공직자로서 열심히 살았으면 되었지, 죽어서도 구차하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소신과 가치관은 어느 소인배들과 달리 현생(現生)의 영화(榮華)와 명예(名譽)마저도 거리낌 없이 벗어나고자 했던, 역시 큰 인물이었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그는 대범하고 큰 정치인으로서 철저한 자기 관리는 물론 심지어 가족들까지 철저하게 관리했다. 

즉, 보수적 윤리와 책임의식에 철저하게 함몰되었던 유례없는 공직자이자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결벽에 가까운 ‘원칙고수와 자기관리’ 탓에 특히 가족들은 정말 맘고생이 심했었다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말과 행동거지에 신중함을 늘 강조 했기에, 일상적으로 하고픈 일과 말조차도 속으로 삭여내야만 했었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빌미로 접근하는 세상의 유혹을 떨쳐내야만, 떳떳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소신 탓이었을 것이다. 

이런 대목은, 자서전이자 성찰의 의미를 담은 그의 저서 ‘약속을 지키는 사람 이완구’에서 부인과 자식들 그리고 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솔직 담백한 심경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직자와 정치인으로서의 이완구는 몸과 마음의 진력(盡力)을 다 쏟아 냈다는 평가들이 많다. 

즉,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사사로움을 접어둔 채, 온 에너지를 쏟아낸 열정적인, 인간이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가 혼신을 다해 쏟아낸 이타심(利他心)과 희생, 애민 애족의 애국심이 있었기에, 국민과 도민들은 인간 이완구에 열광하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몸은 청양 땅에 묻혔지만, 아직도 그의 단호한 결단력(決斷力). 강한 절제심(節制心). 강한 추진력(推進力)은 다행스럽게도, 3인방을 통해 잘 이어 저 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분신(分身)이나 다름없는, 영원한 비서실장의 최민호는 세종시장으로, 김태흠은 충청남도지사로, 리틀 이장우는 대전시장으로, 맹활약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27년에 있을 U대회 유치도 그의 가신인 3인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후일담(後日譚)이다. 

특히 최민호 시장은 세종시 건설을 주도했던, 건설 청장을 지낸 경험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알파)해서 호주의 행정도시 ‘캔바라’ 이상 가는 세계적인 명품도시를 만들겠다며,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에 따른 성과가 속속 들어나고 있다며, 세종시민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아무쪼록 이완구 전 총리의 유지(遺旨)를 잘 받들어 성공한 3인방이 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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