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무법자(荒野의 無法者)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삭막하고 드넓은 황야에, 허무한 먼지와 바람을 가르고, 울려 퍼지는 종소리, 전자 기타 소리, 이국적인 피리 소리, 민속적인 북소리, 휘파람 소리와 함께 한 시대를 장식했던, 영화가 바로 ‘황야의 무법자’다. 

이 영화는 1964년 이탈리아에서 제작되어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1960년대 초반, 미국 TV 서부극에 조연으로 출연하던 3류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데려다가, 서부극의 영웅(英雄)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는 1966년에 처음 상영 되었는데, 서울 명보 극장에서만 4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의 극장가를 깜짝 놀라게 했었다. 

또한, 이 영화의 주제곡인 ‘방랑의 휘파람’을 이 나라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기만 하다. 

1872년 멕시코의 국경 가까운 산미켈이라는 마을에 ‘조’라는 총잡이가 찾아온다. 이 마을에 부패한 보안관 모라레스 패거리와 멕시코 갱, 로호 패거리 간의 알력 싸움으로 점철된 곳이다. 

즉, 총잡이들이 우글거리다 보니 무법천지와도 같은 곳이기도 하다. 

조는 마을에 도착하자, 그에게 덤벼드는 모라레스 부하 4명을 깨끗이 처치하고 로호 형제 집에, 의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나절, 마을 술집에 들른 조는 마을 사람들이 두 집안의 싸움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과 로호의 동생 라몬이 아이가 있는 여자 마리솔에게 흑심(黑心)을 품고, 강제로 끌고 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조는 마리솔을 구해내어 모라레스 일가로 하여금 돌보게 하였다. 

화가 난 로호 형제는 모라레스의 외아들을 볼모로 잡아둔 후, 그 아이와 마리솔을 교환했다. 그리고 로호 형제는 비밀리에 모라레스 집안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무렵, 조는 마리솔 모자(母子)를 멀리 도망시켜 준다. 
그러는 과정에서 조는 그들에게 붙잡혀 참혹한 고문을 당한다. 혼신을 다해 간신히 로호네 집을 빠져나온 조는 장의사 주인의 인도로 가까스로 피신한다. 마리솔이 도망치고 조까지 놓친 로호는 모라레스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식구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다. 

모라레스 집에서도, 조를 찾아내지 못한 로호네 패거리들은 술집 주인을 붙잡아 마을 광장에 거꾸로 매달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이다.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다. 

그 순간 거기에 주인공 조가 나타난다. 
로호의 패거리들은 조를 향해 총을 마구 쏘아댄다. 그러나 조는 태연히 서 있다. 조의 방아쇠가 빨랐기 때문에 모두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주인공 조는 갱들과의 마지막 결투에서 승리하고는 말에 올라, 유유히 마을을 떠나간다.
‘황야의 무법자’는 가히 서부 영화의 정점(頂点)이라고 해도 과찬은 아닐 듯하다. 흔히, 황야의 무법자와 석양의 건맨 그리고 석양의 무법자를 한데 묶어, 달러 3부작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황야의 무법자’를 필두로 하여 ‘석양의 무법자’ 등을 연속적으로 히트시키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감독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이러한 아류(亞流)의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는데 장고, 돌아온 장고, 석양의 건맨, 무숙자, 석양에 돌아오다 등을 꼽고 있다. 

그 후, 150여 년이 지난, 이 땅에도 여지없이 둘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 윤석렬 정권에 맞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한 정책. 거짓 통계자료, 평화 쇼, 조선 최고의 사기꾼 봉이 김선달을 빰 치는 사기행위, 불법 대북 송금, 이적행위, 부정과 비리혐의, 조작행위 등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다가 적발되거나 발각되면,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뗀다. 

나는 그 사람과 만난 적도 없고, 전화 통화 한번 한일이 없다며, 펄쩍 뛰고 난리를 친다. 더욱이 가증스러운 것은 내가 그 사람하고 전화 통화 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오히려 성질을 부린다. 그리고 소설 쓰지 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진술이 나오고, 증거들이 하나씩 나오면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린다. 그리고는 검찰독재가 정치탄압, 야당탄압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러다가 기소되어 구속된다면, 검찰과 경찰을 패대기 치려하고, 사법부를 ‘완박’해야 한다며 장외투쟁을 선동하기도 한다. 

요즘 양산의 폐주가 저질러 놓은 실정(失政)으로, 국격이 한없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석고대죄보다는 검찰을 독재로 몰아부치고, 자기방탄(自己防彈)을 위해, 총질을 해대는 놈들을 보면, 황야의 무법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말하기를 황야의 무법자에 등장하는 갱들은 결코, 자기 자신과 부하들에게 쪽 팔리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명색이 두목이라는 자들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거짓 진술을 강요하거나, 진실을 조작하여 혹여나, 양심에 찔리는 부끄러움이 있기라도 하면, 그들은 즉시 할복하거나,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만다는 것이다. 

그 선택이야말로 부하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양심 있는 패거리의 두목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보다는 자신의 부하들을 더욱 소중이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 두목들은 자신들이 먼저 애국하고, 충성하며, 희생하고, 헌신하며, 양심적이어야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150년 전의 갱들도 그러 할진데, 이 땅에서 169명의 패거리를 거느린 두목이라는 놈이, 기껏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한마디로 패착(敗着)이 아닐 수 없다. 

여보시오! 무법자들이여! 언제까지 국민들 앞에 당당할지 참새들은 지켜보고 또 지켜 볼 것이요.
요즘 이 나라를 둘로 갈라치기 했던, 조국일가의 범죄가 백일하에, 낱낱이 들어나고 있다. 

요즘 하는 싹수로 봐서는 항소는 물론이요, 상고까지 갈 심산인 듯하다. 정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하늘에 부끄럽고 국민에게 쪽팔려서라도 그런 경거망동은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어찌 그리 후안무치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양산과 여의도는 물론, 온 천지에 황야의 무법자들이 설쳐대고 있다 보니, 나라가 늘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 황야의 무법자들을 ‘완박’할 때가 서서히 다가오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 나라의 자유는 황야의 무법자들이 아닌, 정의(正義)의 총잡이들이 지켜오지 않았던가! 말은 바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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