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후퇴의 참상(慘狀)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럽게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6월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하고,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며 남하하였다.

그러나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조직된 유엔군은 낙동강에 방어선을 치고 북한군의 남진을 막았으며, 9월 15일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의 배후를 차단했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북한군을 쫓아 북진을 시작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10월말에는 압록강 유역인 평안북도 초산에까지 진격하였다. 함경도 지역에서 싸웠던 유엔군도 원산에 이어, 혜산진과 두만강 유역까지 점령하였다. 

반면에, 한국군과 유엔군에 쫓겨 패퇴(敗退)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산악지대인 함경북도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이 지원한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 끝에 승리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세운 중국공산당 정부는 북한의 패배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고, 1950년 10월 19일 1차로 26만 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중공군은 산지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급습하는 인해전술(人海戰術)로, 평안북도 운산과 영변 일대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유엔군은 중국군에 대한 총공세를 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청천강 이남지역으로 물러난 뒤, 평양이 다시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고, 1951년 1월 4일 의정부 방어선이 뚫리면서,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북한군에 넘겨주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4후퇴’라는 명칭은, 서울을 빼앗긴 날짜에 기인하는데 이때에 수많은 난민과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그중에서도 함경도 지역에 있던 유엔군과 국군은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공격하다가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몰사 직전이었던, 미군 해병대와 국군은 겨우 흥남으로 탈출하여, 해상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북한 지역의 피난민들은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즉, 군인들 약 10만 5천명과 피난민들 9만여 명이 운집(雲集)한, 흥남 부두는 순식간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되고 말았다. 

이때, 미군 지휘부는 피란민을 태우는 것을 꺼렸다. 배도 부족했지만, 시간이 지체되는 것과 혹시 스파이가 침투할 가능성 등을 염려한 것이다. 

하지만 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미 10군단 소속의 현봉학 통역관은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라며 책임자인 10군단 지휘관 알몬드 장군을 설득했다. 

이에 감동한 알몬드 장군은 엄청난 양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바다에 버리고 그 자리에 피난민들을 태웠다.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난 배는 7,600t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이 배에 피난민이 승선하고 있던 중에도 미 육군 3사단의 병력이 후방을 방어하다, 여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다행히 피난민 중에, 희생자는 1명도 없었다. 

드디어, 12월 23일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정원 60명보다 230배가 넘는 1만 4천명을 태우고 기적 같은 항해는 시작되었다. 

선상에서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은 폭등을 일으키고 남을 정도였지만, 다행히 하루가 지난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미 부산에는 다른 피난민들이 가득 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되고 말았다. 라우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피난민은 다섯 명이 늘어나 있었다. 

아기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미군들은 아기들에게 ‘김치’라는 임시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렇게 ‘김치’ 아기는 1호부터 5호까지 태어났다. 

같은 날 알몬드 장군은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무기를 중공군에 뺏기지 않도록 흥남 부두를 폭파시켜 버렸다. 그 후,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대의 애환과 설움이 담긴 영화 ‘국제시장’은 이 나라를 온통 눈물바다로 만드는 바람에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다시 회자(膾炙)되었고,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이야기는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다행히 이날 9만 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구출되기는 했으나,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이 배에 타고, 살려주시면 평생 하나님을 잘 섬기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서원(誓願)했던 임길순은 대전에서 그 유명한 성심당 빵집을 운영하며, 평생 이웃을 섬기는 삶을 실천했고, 교인 100여명과 함께 배에 탈수 있었던 이계실 목사는 연합덕천교회와 성경신학대학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파했다. 

김치5호로 불린 이정필씨는 평화 가축병원을 운영하며 평생 봉사활동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또한 문재인 대통령은 본인의 부모도 이 배에 승선했었다는 후일담(後日譚)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렇다! 위기에 처한 동족을 살려달라고 설득한 김백일 장군과 26살 청년 현봉학.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 알몬드 장군과 라우선장 그리고 함께 협력해서 탈출을 성공시킨 승조원들, 그리고 배에 탔던 피난민들의 이야기는, 인생의 신비(神秘)와 기적(奇蹟)은 물론, 역사의 심오(深奧)함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는 국가관과 안보관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즉, 조선의 병자호란과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1.4후퇴의 참상도 부질없이 잊고 산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봉황이라는 자(者)들은 안보를 가지고 평화 쇼를 하더니, 결국은 국민들을 기만하던, 사기극이었음이 여실이 드러나고 있다. 

수차례의 핵실험과 미사일 위협을 당하고, 번번이 얻어터질 때마다 국민들은 울화통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지곤 했었다. 

수년 전에도 그랬듯이, 며칠 전에는 드론 5대가 서울 상공을 휘젓고 다니다 사라졌다고 한다. 너무나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 또한 문재인 정권의 연장선이 아니라고 변명할 터인가! 

이 한심한 작자(斫子)들아, 국민의 이름으로 고(告)한다

안보는 생명(生命) 대(對) 생명(生命)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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