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제국주의, 나치즘, 공산주의, 강압적 독재…. 그래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야만의 올가미 속에서 건져 올린 김재규야말로 20세기가 남긴 가장 큰 성취다. 

김재규가 법정에서와는 달리 변호인 접견을 통해 살고 싶은 욕구를 내비친 적은 없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유신 기간에 우리 사회에 쌓인 많은 쓰레기를 청소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 내리도록 도와주는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라고 고백했다. 

당시 김재규는 사형당하지 않았더라도 얼마 못 살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다.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쐈다”고 말한 김재규는 변호인 접견에서 살해 동기에 대해 “독재와 야당 탄압, 부산과 마산의 시민항쟁,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박정환의 문란한 사생활과 그에 따른 판단력 마비가 또 다른 이유였다”고 거듭 주장했다. 

최고 권력자의 사생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충격! 그 자체이다. 
박선호 피고인은 법정진술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마음에 걸려 김재규 부장에게 ‘이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두어번이나 사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절대권력자의 문란했던 사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토로였다.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의 술자리 여인들에게 주는 화대는 50만~100만원 선이었고, 이름 있는 스타인 경우는 그 두 배를 주었다. 

‘당대 최고’의 술자리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의 상상보다 꽤 짠 편이었다. 
그 이유는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그런 지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중간책이 장충동에 있던 모 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김 마담은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 거물 정치인과 접하려는 ‘화류계 매미(賣美)’들의 대모였다. 

특히 연예계에서 스타가 되기 전 20대 초의 나이 어린 신참들이, 김 마담으로부터 은밀히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응락했다. 이들은 그런 자리에 갔다 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연예계의 정상에 다가가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영화나 TV연예프로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려왔다. 

갑작스러운 궁정동 연회 차출 지시로, 영화나 TV프로 촬영 스케줄이 펑크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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