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또 하나는 홍익대학교 재단이다. 이 재단의 소유자는 독립운동가 출신 이흥수 홍익대 초대 이사장으로부터 사들인 이도영 일가다. 

재단 퇴진운동으로 인해 1961년 이사장 자리에 물러나 있던 이도영은 1963년에 다시 복직하는데, 이때 박정희 일가와의 인척 관계가 도와주지 않았나, 라는 의혹이 존재한다. 

일부에 의하면, 이도영의 차남 이석훈 재단 전 이사는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의 딸 육해화와 결혼했다. 육인수 또한 재단 이사를 지냈다. 이들 또한 홍익대 재단 이사장직을 내리 물림하고 있다. 

전국에 숨겨진 강탈된 박정환 일가의 재산이 얼마가 될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박정환 정권 당시에 사업을 벌였고 인척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창업자들이 사업을 누구에게 이전할지는 본인의 마음이지만, 당시 대통령과의 관계를 내세워 이익을 취한 사업자들에겐 재산을 반환받아야 한다. 

“누가 어디까지 형사 책임을 져야할지 모르겠고마예.”
“국민들이 그러면 할 말이 없을까?” 
“그들 계획을 탈 없이 지키려면 뭐가 됐든 다 감췄고마예.”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서다.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비록 1944년 7월에 소위로 임관되어 마쓰야마 제14연대에 배속받게 되고, 이후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모란 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열하지구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됐다. 

그 부대는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산하에 간도 특설대였다. 박정환이 활약 당시 항일 세력으로는 우리나라 젊은이들로 구성된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등이 있었다. 이때 그에 행적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박정환 독재숭배자들이 역습하지 않도록 경계·주의하며 박정환 독재 유산을 단죄·청산해야 한다. 그러나 박정환 장기독재, 그 잔인하고 참혹했던 독재의 유산을 말끔히 정리, 청산, 제거하지 못했다. 

소위에 계급을 수여한지 불과, 만 일 년만인 1945년 8월 민족의 배신자 박정환을 중위로 진급을 시켰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그 전에 조센징이라 박해를 받았던 지난 일들을 뒤돌아보면, 그 나름대로 가슴 아픈 사연인들 오죽하였겠는가?

그러니 한풀이의 일환으로 기모노를 입힌 채로 색을 즐겼고, 잠시나마 일인에 대한 통한을 즐겼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그에 과거 또한 얼마나 애환이 많았겠나?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라의 운이 기박하여 겪은 일인걸, 뭘 어쩌겠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반드시, 그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며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 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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