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2대 독재자 박정환은 끊임없는 숙청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으며, 절대권력을 남용해 ‘새마을 운동’으로 지도자들을 공화당원에 가입 활동케 하는 등 정권유지체제에 적극 활용했다. 

3대 독재자 전두환은 ‘겉치레와 화려한 행사’의 힘을 깨닫고 3S(섹스·스크린·스포츠)를 통해 집권 유지를 꾀했다. 그가 권력을 잡기위한 방편으로 ‘광주 학살’이란 만행을 저지르는 참극을 낳기도 했다.

개인숭배는 이만승에 이어 박정환의 공포정치를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겨우 잡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독재자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교묘한 속임수’, ‘각개 격파’로 정적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결국에는 개인숭배가 가장 효율적이었다. 
개인숭배는 측근과 경쟁자를 똑같이 약화시킨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독재자를 칭송하게 강요함으로써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모두가 거짓을 말하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모자를 찾아서 쿠데타를 일으키기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노동자와 농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어 갔다. 

하지만 빛나는 선전의 이면에서 개인숭배는 두려움을 동반했다. 

유신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박정환 정권시절 각하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누구는 구속당하고, 누구는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박정환은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할 이념까지 만들었으니, 그것이 ‘국민교육헌장’이었다. 

1972년에는 유신이 선포됐다. 이른바, 긴급조치 시대, 혹독한 겨울이 시작됐다. 길고도 추웠던 겨울은 1987년 6월에 끝났다. 그 시절 풍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국민교육헌장을 한자도 틀지지 않고 외워야 했다. 중고생들은 체력테스트에서 모조 수류탄을 던졌다. 

여학생들도 군사훈련을 받았다. 북한보다는 북괴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다. 

박정환이 죽었다는 뉴스에 기쁨보다 두려움에 떨던 세대였다. 

또 한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광주를 경험했다. 
수배와 고문, 투옥이 이어졌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아버지는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을 떠났다. 학교에 나타나기가 두려웠다.

1987년 6월, 대학가는 최루탄과 돌맹이가 난무했다. 
연일 교문을 사이에 두고 민주와 독재가 대치했고, 강의실은 텅 비어있었다. 기말시험은 연기되거나 거부되었다. 난 아미노 상태에 빠졌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짧았고,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에 의해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대학교 교정은 아름다웠지만, 총성이 울릴 만큼 살벌했다. 나뭇잎조차 양심을 찔러댔다. 

‘존경하는 아버지’는 무자비한 탄압과 ‘감옥과 군대’로 끌려가는 제자들을 보고도 침묵했다.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대학에 나타나기가 두려웠던 나는 외톨이가 됐다. 그때 끌려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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