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민주화를 열망하던 민중들에게 박정환의 공포정치는 참혹했다. 

부패 무능독재자 이만승에 이은, 박정환의 심복 3대 독재 세습자 전두환은 또 다른 독재 군부세력이었다. 

성공적으로 군사반란을 마무리한 전두환과 반란군은 신년행사에서 연예인까지 동원한 화려한 파티를 연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찬탈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집권을 위한 위장된 술책이었다. 

안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이기에 피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실천으로 생각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987년과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가. 

봉준이와 내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70년대였다. 처음으로 문을 연 관악캠퍼스에서 수업을 시작한 지 불과 두 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유신체제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격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4월 초순에는 전 대학이 휴교에 들어갔다.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한 유신헌법에 따라 1974년부터 남발되기 시작한 긴급조치는 1975년에 이르러 더 자주 발효됐다. 

사상의 자유를 철저하게 부인하는 긴급조치 9호가 6월 초에 발표되고 대학은 바로 다시 문을 열었지만, 캠퍼스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숫자를 알 수 없는 사복경찰이 캠퍼스에 학생들과 같이 상주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다녔고 긴급조치 9호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이 지난 1979년 12월에야 해제됐다. 서슬이 퍼런 70년대의 봄, 대학생활은 암흑기였다.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았던 당시의 대다수 젊은이에게 베트남 전쟁의 실체는 무엇인가, 중국의 사회주의는 어떤 것인가 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는 선과 악 그리고 우리는 선의 편에 서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강요받고 있던 시대에 비판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 그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화염병 등의 시위 도구를 나르던 여학생은 심한 고초를 당했고, 현장에서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학우들이 잠깐 5분 정도의 ‘해방구’를 만들어 “제헌의회”니 “민주 정부”니 하는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장사 안되고 도로가 시끄러워지니 “저놈의 빨갱이들 잡아가라”는 것 최소한 1987년대까지 벌어진 일이었다. 

길거리에서만이 아니다. 당시에 교회에서도 그랬다.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외신 기자의 기록물 영상을 통해 참혹한 상황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니는 자기 또래의 보수 지지율이 왜 높을까라는 의문에서 소설을 시작했다고 밝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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