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한데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성스럽고 아름다운 민주주의는 세월이 흘러도 그 위치가 묘연하기만 했다. 

보수주의자들을 바보라고 명시해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통털어 보면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중 가장 절망스러운 때는 보수정치인과 당원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들을 부정하며 관련 정책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일 때다. 

그런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이 믿는 것과 다른 증거는 무시하고,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증거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만 받아들이는 것은 ‘동기화된 추론’을 하는 뇌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어떤 변화를 부정하고 심지어는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한다. 이런 사람들이 한 나라에서 거대한 정당을 구성해 정권을 잡고 관련 정책을 좌절시키고 있는 건 엄청난 비극이다. 

이들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대통령은 어렵게 합의된 사안을 선언하고도 과학적 근거와 합의를 바탕으로 만든 것들을 무시해버린다. 

근거를 제시하면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아, 뇌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구나.’ 동시에 막막함도 느낀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실을 믿게 하지? 이게 숙제다.

민청학련은 조직적인 반유신 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전국의 학생운동 세력이 전국 대학의 일제 시위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직되었다. 

나아가 민청학련은 반유신 독재운동을 학생운동과 같은 단순히 특정 집단의 운동이 아닌 종교계, 학계 등의 광범위한 세력과 연계해 추진하게 된다. 따라서 민청학련은 이후 전개될 여러 노동, 재야, 민주, 통일운동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민청학련에 대해 박정환 정권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정환 군사독재정권은 민청학련을 잠재울 궁리 끝에 10년 전 ‘인혁당’을 기억해 낸다.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했던 것이다. 

1974년 4월 3일 교수와 학생 중 무려 254명이 구속되는 대규모 시국공안사건이 터진다. 민청학련이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공산당, 국내좌파, 혁신계 인사가 사건의 핵심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인혁당 사건의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를 통해 국가보안법, 반공법위반, 내란죄, 내란선동 등으로 기소된다. 인혁당 주요 주모자로 지목된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도예종, 김용원, 여정남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심이 열린다. 대법원은 관련자 254명 중 36명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도예종 등의 8명에게는 사형을 확정한다. 

이튿날 가족을 만날 기회조차 없이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차례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