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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天風 11 보수·친일·유신단죄 16소설가 김재찬
세종매일  |  ygnew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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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1.02  15: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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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민 한 국가의 위상과 품격은 그 저항에 달려 있다.

저항층이란 자유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우리 역사에서 개혁적인 일을 하려던 사람들이 목숨을 온전히 부지한 예가 없다. 중국·한국·일본의 해상을 지배한 장보고는 국정을 개혁하려다가 부패한 귀족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사법부로 기소된 57명 중 12명에게 만 실형을 선고했다. 그들조차도 3년에서 1년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았다.

1차 인혁당 사건은 독재정권의 민심 돌리기용으로 적당히 결말을 맺었다. 적어도 사법살인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10년 후. 반유신독재 운동의 중심인 ‘민청학련’을 죽이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다시 인혁당 사건을 끌어냈다.

1974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반유신 독재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환 정권이 비상적 헌법 조치인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한 시점이었다. 당시 반유신 독재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 단체가 바로 ‘민청학련’이다.

새로 등장하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존재의 필요와 새로움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게 되면, 누구나 지치는 법이고 이는 거대한 허무와 고독에 휩싸이게 한다.

지난 일들을 복기하면 할수록 어떤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무언가에 맞서야만 하는 막막함과 동시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된다.

5·16쿠데타 이후 세상은 달라질 것이었다. 물론 이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때도 있다. 박정환. 최고의 권좌인 대통령에 올라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겐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온 충실한 일본인이었다.

한때 같은 군 동료인 정일권, 백선엽 등과 만주에서 독립군토벌대에서 활약하였다고 알려진다. 그에겐 조선이 해방되리란 생각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커다란 좌절이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평생 친일의 속내를 드러내놓지 못할 치욕에 부대꼈을 것이다. 박정환. 그러나 그에겐 또 하나의 레드컴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존경했던 둘째 친형. 박상희. 그는 독립운동가였지만, 공산주의자로 구미·선산 남로당 총책이었다.

대구 10·1항쟁사건 중 경찰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 6·25 전쟁 이후 반공이 국시처럼 된 남한에서 남로당 출신이란 점은 박정환에겐 콤프렉스가 되었다.

자신 또한 남로당에 비밀가입한 사실은 평생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를 일순간 불식할 수 있는 유일함이 쿠데타였을 것이다.

출세주의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권좌에 오르는 유일한 길이었으리라. 평생 뒤따를 철저한 일본 군인, 친일경력과 여성편력, 그리고 자신조차 남로당 빨갱이란 딱지를 속시원히 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5·16쿠데타, 군사정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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