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名不虛傳)(2)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천세봉(1904-1964) 목사를 흔히 민족주의자요, 항일 운동가이자, 작은 예수라고 부른다.

그는 1904년 3월7일 경북 군위읍 소보면에서 아버지 천기선과 어머니 이화실 사이에서 태어났다. 군위 읍내에 소재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상경하여 보성중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이 학교는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곳으로 3.1운동을 일으킨 주요 거점의 하나였다.

교장 최린은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참여했으며, 교사 최남선도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3.1운동 거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었다.

학생들도 서울지역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이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 탄압으로 민족운동 진영(陣營)은 크게 와해되고 있었다. 주요 지도급 인사들은 감옥에 있거나 만주, 시베리아 등 해외로 망명(亡命)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독립의 염원으로 뜨거웠던 천세봉은 자신의 무력감에 고심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다보니, 건강이 날로 쇠약해져만 갔다. 결국,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제되는 바람에, 대신 양정고등보통학교 2학년 보궐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천세봉은 학교를 옮김에 따라 하숙집도 북아현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마침, 그 하숙집 옆에 아현동 교회가 있었지만, 예수님을 섬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921년 3월에 신축한 경성성서학원((현)서울신학대학교)이 준공을 앞두고, 40일간의 전도 집회를 이어가고 있었다.

기도회 마지막 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신학생들과 교역자들이 기쁨에 이끌리어 악대(樂隊)를 동원하여 전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천세광은 전도대원들의 진실됨과, 선한 열정에 감동을 받아, 그날 밤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인생문제, 국가문제의 해결은 오직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에만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1년 후인 1922년 3월에는 세례를 받으며, 그는 홀연히 공중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 배척운동(排斥運動)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근처 사립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며 군위 성결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다.

이때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사역자의 길을 걷고자, 1923년 11월 16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2학년이 되던 해인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 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옥고를 치른 후, 다시 복학하였고, 졸업연도인 1927년에는 ‘조치원 성결교회’의 전도사로 첫 파송을 받았다.

천세봉이 부임한 이후부터, 이 교회는 새로운 부흥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영적으로 척박하기만 했던 조치원 지역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성령의 맹렬한 임재, 죄에 대한 철저한 각성, 통회자복의 회개, 신유의 역사를 특징으로 하는 부흥운동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33년 3월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경주교회와 삼천포교회를 비롯한 여러 곳을 거치면서 사역하였다.

이때부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된 천세광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민족독립정신을 포기할리 만무했다.

그의 항일 민족정신은 삼천포에서 목회할 때 직면했던 신사참배(神社參拜)의 거부에서 그 면모가 드러났다.

그는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했다는 이유로 진주형무소에서 7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또한 일제의 광기(狂氣)가 최고조에 달했던 1943년에도 재림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천황에 대한 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죄, 군법위반죄 등을 적용하여 마구잡이로 투옥시켰는데, 이때는 고향집에서 구속되어 9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

결국, 천세봉은 성결교단이 강제해산 당한 후인 1944년 2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나왔지만, 이듬해 또다시 사상범으로 구속되어, 군위 경찰서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이처럼 3여년간의 4차례 옥중생활로 천세봉의 몸무게는 3분의 2나 감소할 정도였고, 추위로 동상을 입어 발톱이 다 빠져 석회질만 남았고,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손마디와 다리뼈가 거의 상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그의 노년은 건강하지 못했다.

그가 이런 역경의 나날 속에서도 믿음의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너희들이 세상에 있을 때에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는 하늘의 성언(聖言)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 후, 천세봉은 군위에서 치안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성결교회 재건운동을 주도 하였다.

일제 말기 한국교회 지도자들 대다수가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훼절(毁折)과 굴욕(屈辱)의 길을 걸었지만, 민족적 신앙 양심으로 투쟁한 천세봉 목사야말로 교회 재건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교회 재건이 마무리되자 그는 미련 없이 다시 지방으로 떠났으며, 1964년 2월 28일 그리던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4년간 평신도 생활과 36년간의 교역자 생활을 통하여 얻은 결심자 수가 총 76,293명 이었고, 개척한 교회가 38곳이라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천세봉 목사가 남긴 믿음의 절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작은 예수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 했던가!

이 작은 예수가 약 3년간 시무(始務)하셨던 조치원 성결교회의 어느 장로는, “우리 교회는 천세봉 목사와 순교자 김동훈 전도사 그리고 최상희 원로목사를 비롯하여, 훌륭한 목회자를 많이 배출한 성지순례교회(聖地巡禮敎會)”라고 말한다.

오늘의 최명덕 담임목사님도 성서가 쓰여진 나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하셨고, 미국의 명문 달라스 신학대학교에서 설교학을 전공하셨다.

또한, 진리와 성결의 동산인 서울신학대학교((전)경성성서학원)의 이사장으로, 수많은 저서와 번역서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 중에서 유대인의 이야기(두란노, 1997)와 마틴 길버트의 지도로 보는 이스라엘 역사(하늘기획, 2001)는 베스트셀러(Best seller)다운 면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특히, 성서의 말씀과 인간 이해를 중요시 하는, 즉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닌, 늘 섬기는 목회자님이시라고 몇 번을 강조하고 있는데, 조금도 지루하거나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조치원 성결교회’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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