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긴급조치라는 것을 선포해 저항세력을 제압하려 했다. 

교수재임용제도를 만들어 지식인들을 대학에서 추방했다. 대학에 몸담고 있던 아버지는 이 위기적 국면의 한 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다.

권위주의체제의 치부를 예리하게 규명하는 아버지의 ‘비판정신’은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달리면서 위기의식에 휩싸여있는 권력자들과는 결코 조화될 수 없었다. 반듯한 사회, 좋은 사회란 자유로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다. 

절실한 바람은 진실에 눈을 뜨는 데 있을 것이다. 

나무 한 그루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獨木不林). 자기중심의 교리나 도그마, 계산하는 사유에서 벗어나 너와 나 , 우리 모두의 공동체, 진정한 이야기 문화, 담론문화의 형성이 중요하다. 

아버지는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한 비판도 서슴치 않았다.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만 주시오.’ 진보당 사건으로 처형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조봉암이 남긴 유언이었어.”

1958년 1월 제1공화국 정권하에서 일어난 광복이래 두 번째 사법사건이자, 조작극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퇴보시킨 사건이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 이 사건으로 진보당은 강제해산당하고 당수 조봉암이 사형을 당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조봉암은 비록 낙선하기는 했지만, 4년 전인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 때보다 무려 3배 이상의 득표를 얻었다. 

이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이만승과 자유당은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여, 일련의 정치재판을 진행했는데, 이를 ‘진보당 사건’이라고 한다. 

검찰은 진보당 간부들이 15명의 간첩단과 접선한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진보당의 평화통일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아 그들과 내통한 혐의가 짙다는 이유로 진보당 전 간부를 검거, 송치했다. 

이 무렵 간첩 양이섭이 군수사기관에 검거되었는데, 당국은 조봉암이 양이섭과 접선하면서 공작금을 받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 행위를 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당국은 재판도 열리기 전인 2월 25일 진보당의 등록을 일방적으로 취소시켰다. 상고심의 관여법관 5명중 4명은죄다 친일 의혹이 있다. 특히 백한성은 노골적인 친일행각으로 악평이 자자했다. 

조봉암은 간수를 매수하여 양이섭에게 쪽지를 보내다가 걸렸다고 하는데, 이것을 ‘통방사건’이라 한다. 당시 이 사건에서 유력한 증거로 내놓았는데, 결국 조작으로 밝혀졌다. 

판결문에 따라 조봉암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변호인단의 재심청구가 기각되는 등, 변호인단과 딸(조효정 여사)의 애절한 구명운동도 보람없이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자유당에서는 눈엣가시 같았던 조봉암을 없애기 위한 이런 무리수를 두었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민심은 거의 자유당에 등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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