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아픔을 시심(詩心)으로 품은 윤동주’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1941년 11월20일에 빚어낸 윤동주의 서시(序詩)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암울하기만 했던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특히 1941년에 이르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어교육을 전면 금지하고‘조선사상범 예비검속령’과‘국방보안법’등을 공포하였다.

또한‘학도정신대’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강제로 근로 동원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이 벌어져 일본 놈들의 광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렇듯 서시는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식민지속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문화에 특별한 의식을 가졌던 이들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시간이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윤동주 또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현실에 순응하기보다 부끄러움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노래했다.

그 길은 다름 아닌 겨레 사랑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윤하연 으로 부터 내려온 독실한 기독신앙으로 인하여 유아세례(乳兒洗禮)를 받았다. 이곳 북간도에는 조선의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1899년 김약연을 비롯한 몇 가구들이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 마을을 이루었고 이후, 고향을 떠난 많은 이주민들이 와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였다.

7년 후인 1906년 10월에 전(前) 의정부 참판 이상설이 세운‘서전서숙’이라는 신식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이상설이 이준 열사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동행했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그 당시 서당 몇 곳을 해체하고 세운 학교가 그 유명한 명동학교였던 것이다.

초창기에 마땅한 교사가 없어 물색하던 중에 민족교육에 관심이 깊으며 이상설과 친했던 정재면 선생이 발탁되었고 그는 정규과목으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명동촌에 신문학과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후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였고 북간도 지역의 민족교육과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항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만세운동부터 1920년 봉오동 전투, 그해 10월의 청산리 전투를 거처 간도 대토벌(경신대학살)이 있기까지 북간도는 온통 독립군의 본거지였다.

그 배경에는 바로 북간도의 교육을 대변하는 명동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캐나다 선교부가 교통의 요지에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 등 미션스쿨(Mission school)을 세우면서 북간도 교육의 중심지는 자연스럽게 용정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윤동주는 명동학교의 마지막 빛을 장식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윤동주와 문익환 가문도 명동을 떠나 용정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윤동주는 송몽규 문익환과 은진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또한 은진중학교도 기독교 계통으로, 마치 명동학교를 옮겨다 놓은 것처럼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특히 이 학교의 선생님들은 여느 곳과 달리 일본어로 되어 있는 교과서를 우리말로 읽고 가르쳤다고 하니, 이 학교 역시 기독교민족운동의 얼개가 분명했던 것이다.

1935년 9월 1일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이 학교 또한 기독교 민족운동의 정서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그 명령을 따랐지만, 숭실중학교는 끝까지 거부하여 그로부터 2년 후인, 1938년 3월 19일자로 40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다시 귀향하여 용정의 광명학교를 마친 윤동주는 1938년 4월 송몽규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자기만의 시(詩)세계를 만들어 갔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시대인식과 자아 성찰을 위한 고민과 몸부림이 고독한 순례자처럼 아로 새겨졌던 것이다. 특히 1941년 5월 31일에 작시된 십자가에는 그 시대에 항거하는 숭고한 사명의식이 깊이 담겨져 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 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년 후인 1942년 4월 2일 윤동주는 동경의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이어 10월에는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입학하게 된다.

이때 일본 유학에 필수적인 것이‘창씨 개명(創氏改名)’이였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로 살아가게 된다.

그가‘창씨 개명’서류를 제출하기 5일 전에 쓴‘참회록(懺悔錄)’이 고국에서는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이것은 일제의 강요에 따른‘창씨 개명’을 참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유학생활 중에서도 그는 특히, 재일(在日)유학생들과 함께 민족의식과 문화의식을 고취하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고 한다.

“우리가 조선이라는 의식을 잃지 말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연구하며 유지하는 것만이 문화인으로서의 사명이다. 이런 민족의식을 수호하기만 한다면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일제는 이런 사상을 빌미로 1943년 7월 10일‘재(在)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이라는 혐의로 윤동주와 송몽규를 체포 구금하였다.

결국, 그들은 징역 2년씩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일본 놈들의 마루타 실험에 의하여 순절하고 말았다. 그날이 윤동주가 1945년 2월 26일이었고 송몽규는 3월 7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윤동주는 해방을 보지 못한 체 피를 토하며 죽어 갔지만‘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불후의 명작으로 늘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다.

요즘 누구를 막론하고 나라꼴이 암울했던 시대보다 더 하다는 탄식의 소리가 높기만 하다.
즉, 이 나라 각계각층의 봉황이라는 자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하지는 않고, 오히려, 공작, 후안무치, 조작, 조로남불, 추로남불, 문로남불 그리고 남을 탓하는 소리만 크다는 말일 것이다.

또한‘코로나19’를 겪으면서 골든타임을 놓치고, 마스크 대란을 겪은 대다수의 국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요!

아! 봉황들이여! 지금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professional)의 시대라는 것을 명심하시요! 아! 3월 하늘이 파랗다 보니 이 난국 또한 지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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