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육군사관학교 생활은 지금도 혹독하지만 과거 만주군관학교의 생활은 처참할 정도로 혹독했다. 그 무엇보다도 박정환을 힘들게 한 것은 민족적 차별이었다.

공식적인 식사에서도 일본인 생도들에게는 쌀밥을 주고, 중국과 조선인 생도들 에게는 수수밥을 주었다. 게다가 조선인 생도들은 중국인 생도들에 비해 수적 으로도 열세인 터여서 민족적 차별이 더욱 심했다.

“일본 육사시절 그는 동기들에게 ‘우리는 독립해야 한다.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을 이기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고 힘써 배우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치열하게 공부했겠군요.”
“그래서 그런지 그는 생도들 가운데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관동군 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나섰어요.”
“그 무렵 그는 ‘다까끼 마사오’ 라는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뜻밖에도 박정환은 개인에겐 불행하게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독립군 토벌의 지울 수 없는 원죄 때문에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귀국한 그는, 그해 가을 별 문제없이 미군정 산하의 국방 경비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

미군정 당국이 장교를 양성하면서 친일부역자 출신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고, 국방경비대는 이미 박정환의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 선배들이 석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7년 아주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했다. 박정환이 남로당에 입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출세주의자 이자, 기회주의자인 박정환에게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일제시대에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장군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식민지 조국을 배신한 채,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국을 되찾겠다는 동포 독립군들을 사냥하는 일에 나서지 않았던가!

더욱이 해방 정국 당시 한반도를 주도하고 있던 것은 사회주의자였다. 실제로 미군정이 1956년 실시한 국민여론 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가 군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음을 물론이다. 십년, 아니 삼년 만이라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은 주로 후회에서 비롯된다.

체질적으로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론적 무장이 없었지만, 박정환에게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것이 일본군이든, 남로당의 일이든, 박정환이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나중에 공개 된 재판기록과 미군정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환의 당시 남로당 직위는 ‘군사총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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