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명대신들을 제거해야만 했는데, 그중에서 좌의정 지위에 있는 김종서 장군이었다.

그는 수양대군이 대사(大事)를 추진해 나가는데 가장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대사를 도모할 수가 없음을 깨달은 수양은 마침내 치밀(緻密)한 계획을 세운 뒤에 양정과 유숙을 대동하고 달빛이 희미한 초저녁 무렵, 말을 몰아 새 문밖 김종서의 사저에 도착하게 된다.

문밖에 당도한 수양은 큰 기침을 두어 번 하고서 하인을 부른다. 이어 김종서와 그의 아들 승규가 나오자 양정과 유숙이 불시에 달려들어 들고 있던 철퇴로 그들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너무나 뜻밖의 일에 그들 부자(父子)는 대적해볼 겨를도 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만다.

이렇게 손쉽게 김종서를 타도한 수양은 곧장 돈의문을 거쳐 대궐로 들어가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부동(符同)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고 모반하려 하므로 내 미처 상감께 아뢸 겨를도 없이 김종서를 먼저 죽일 수밖에 없었다며 거짓을 고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 무리들을 모두 처단해야 한다며 대궐 출입문 마다 그의 심복들을 배치하더니, 또 다시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이하 대신들을 야심한 밤인데도 불구하고 모두 불러들인다.

불시에 명을 받은 대신들은 모두 궐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둘째문 안에서는 한명회가 살생부(殺生簿)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부(生簿)에 오른 사람은 그 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으나 살부(殺簿)의 사람은 첫째 문에서 그의 시종을 떼어버리게 하고, 둘째 문에서 철퇴로 내리쳐 죽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보인, 이양, 조극관 등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연달아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에 사육신(死六臣)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났지만, 김질이라는 놈의 밀고(密告)로 거사를 해보지도 못한 체 실패하고 만다.

이 사육신의 옥사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왔는데 그 수가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무려 8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옥사를 빌미로, 창덕궁에 있던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1457년 6월 21일 돈화문을 출발한 유배행렬은 50여명의 군졸들로 꾸며 졌는데, 원주와 제천을 거쳐 일주일이 지나 영월의 ‘청령포’(국가지정문화재 제50호)에 도착하게 된다.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호송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강변 언덕에 주저앉아, 그의 애절한 마음을 읊었던 ‘연군의 단장곡’(戀君의 斷腸曲)이라는 시조가 있다.

~천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이 시조에서 그는 참혹한 권력의 희생양이 되신 단종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을 절절(切切)이 표현하면서 당시의 부도덕한 정치권력으로부터 어린 임금을 보호하지 못한 자신의 무기력함을 애통해하는 회한(悔恨)도 있었던 것 같다.

단종을 ‘청령포’까지 압송한 자신의 임무가 그에게는 한없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무자비한 임무가 또 한 번 주어진다.

의금부도사인 자기에게 죄(罪)라고는 전혀 없는 단종(端宗)을 사사(賜死)하라는 사형집행관 임무였던 것이다.

감히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무거운 발걸음으로 ‘청령포’에 사약(賜藥)을 들고 도착은 하였지만, 무슨 일로 왔냐는 물음에 차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고 마당에 엎드려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이에 수행하였던 나장(羅將)이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으니 속히 집행할 것을 재촉하였지만 그는 계속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홀연히 이 일을 자청하는 자(者)가 있었다.

다름 아닌 공생(貢生)이었다.

그놈은 활시위에 긴 끈을 이어 단종의 목에 걸고 뒷문에서 잡아당겨 단번에 보란 듯이 단종을 목 졸라 죽였던 것이다.

이때가 1457년 10월 24일 단종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공생이라는 그놈은 평소 ‘청령포’에서 심부름과 잡다한 일로 항상 단종을 모시던 놈이었다. 그런 자가 주군(主君)을 직접 자기 손으로 교살(絞殺)한 것이다.

세조로부터 그 임무를 하명 받은 의금부 도사 조차도 사태가 너무나 황망(慌忙)하여 감히 집행을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일개 공생 따위가 단종의 운명이 다되었음을 간파하고 권력의 실세에 부합함이 오로지 자기가 살길이라고 판단하고는, 그간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상전을 처형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영국의 아놀드 조셉 토인비는 “고대와 현대 사이에서 역사는 철학적 동시대성(同時代性)을 가지고 반복한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설파한데로 단종이 처형되었던 오백여 년 전의 시대적 상황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서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초의 피나는 권력투쟁에서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수양대군 일파(一派)는 왕권의 정통성과 영구집권을 위해서 반듯이 단종을 제거 해야만 했었다.

이와 같이 오늘 날 대한민국에서도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자신들의 정체성(正體性)을 포장하기 위해서 전직 대통령을 역사상 최고로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으로 낙인찍어 정치적 사형 집행을 단행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왕방연이 쓴 ‘연군의 단장곡’이라는 시조(時調)가 불현듯 스친다.

이미 오백여년 전(前)부터 그래 왔듯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조선의 공생(貢生)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 ‘청령포’에 500여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역사는 정말로 아이러니 하다는 것이다.

요즘 살생부(殺生簿)가 무섭기만 하다. 명심하시요!
이러다 혹시! 내 오지랖만 넓어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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