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간신은 영원한 간신(奸臣)!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TV방송 중에 역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있다.

왕을 농락하며 나라를 파국으로 이끈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간신(奸臣)들 이야기다.
 서기 660년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는 매일같이 해괴(駭怪)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하들은 정사(政事)를 돌보는 일보다는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쩔쩔매고 있었다.
즉, 무기력증에 빠져 식욕마저 잃어버린 왕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날마다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연극을 준비하고 원기(元氣)에 좋다는 음식을 해드리는 것이 일과였는데, 그것을 빌미로 그들만의 권력을 키워나갔다.

왕은 어느 날 좌평 임자의 소개로 금화라는 무녀를 만나 활기를 되찾아 가는데, 이미 그녀의 미모와 신통한 점괘에 푹 빠졌던 그가 백제의 제31대 왕인 의자였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그는 즉위한 후, 강력한 힘과 통찰력으로 다양한 외교관계는 물론, 신라와 고구려와의 몇 차례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하며 찬란한 백제문화의 시대를 열어나갔다.

더이상 이룰 것과 바랄 것이 없던 의자왕은 자만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정사(政事)에는 안중에 없었는지 수시로 자리를 비워 신하들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이때를 놓칠세라, 임자와 금화는 상좌평 성충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작극까지 꾸미는 것은 물론, 역모의 액운이 있다며 왕과 충신 사이를 오가며 고자질과 이간질을 일삼았는데 어리석은 왕은 다른 신하들과는 아예 상종(相從)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엄청난 함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충을 비롯한 충신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 백제의 멸망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런 모사가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게 되었다면 백제의 역사는 달리 쓰여지지 않았을까!

의자왕과 간신들의 모사는 충신들이 처형되거나 혹은 옥에 갇히고 난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꼭 정의로운 자들만의 편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성충을 비롯한 충신들은 국책이 금화라는 무녀의 점괘로 결정되어 백성들이 불안해한다고 간언하지만 왕은 오히려 “금화는 과인의 은인이나 다름없으니 두 번 다시 금화를 비난하지 말라.”고 지엄(至嚴)한 분부를 내리기도 한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신들이 금화를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늦은 밤 신당에서 기도중인 그녀를 날카로운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그 자리에 금화의 차림으로 변장하고 있던 의자왕의 함정에 성충은 오히려 감옥(監獄)에 갇히게 된다. 성충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왕의 분노는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간신들의 모사(謀事)와 의자왕의 광기(狂氣)에 충격을 받은 성충은 장차 다가올 나라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스스로 곡기(穀氣)를 끊고 죽음을 택한다. 그는 역모라는 누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의자왕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금화에게만 의존(依存)한다.
즉,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졸부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에 백제의 삼충신(성충. 흥수. 계백)들은 왕께 간곡히 충언하지만 오히려 왕은 그자들을 배척하기만 한다.

간신들 또한, 실세라고 하는 자리는 다 차지하고 있으면서 백제의 땅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지고 산천초목을 떨게 한다. 연로하신 대신들의 뺌을 서슴없이 때릴 정도였으니 그 위세(威勢)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고도 남을 듯하다.

왕의 권력을 등에 업은 간신들은 매관매직을 포함하여 그 나라에서 못하는 일이 없었다.

수년간 전쟁으로 국고는 비어있고 백성들은 지쳐 있는데도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대책은 전혀 없이 각 고을마다 신당과 사찰(寺刹)을 지으라고 들볶는 바람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만 갔다.

또한 간신들이 내놓은 정책과 전술이 오히려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였는데 국경을 지키는 장수들은 “고구려와 신라의 침범에 대비하여 군비확충과 병력증강에 힘써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였지만 “그건 전쟁이 났을 때의 일이고 설상가상 오랑캐들이 쳐들어 온다고 해도 우리가 번번이 승리하고 있는데 그런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 하라.”는 핀잔과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충신들은 사비성에서 하나 둘씩 쫓겨나갔고, 국고는 텅텅 비어 있어 전의(戰意)를 상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금화와 임자는 드디어 가면놀이를 그만 둘 때라고 웃음 지으며 신라의 무열왕에게 쳐들어와도 된다는 신호를 보낸다. 결국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장군을 비롯한 오천의 결사대는 최후를 맞고 말았다.

백제 멸망의 일등 공신 임자는 정의로운 세력 즉, 영웅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신라로 건너갔지만, 당시 신라의 왕은 “백제의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이다. 즉 한번 간신은 영원한 간신”이라면서 그를 중용하지 않았고 사관에게 일러 아예 기록에도 빼버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무열왕의 정략(政略)과 책략(策略)이 뛰어났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도 그가 남긴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은 큰 가르침으로 내려오고 있다.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고 난후,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가 신라의 무열왕에게 무릎 꿇고 술을 따르는 ‘행주의 예’를 갖추고 나서 당나라로 귀양살이를 가야하는 천추의 한(恨)을 남겼는데 이때부터 백제의 백성들은 호적(戶籍) 없이 살아가야 하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석양 노을이 짙게 깔린 저녁 나절에 항복(降服)절차를 마친 의자왕은 뒤늦게 나타난 신라의 첩자이자 백제의 간신인 임자와 금화에게 도대체 왜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냐고 꾸짖지만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무엇이냐.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것이 없다면 나에게는 쓸모없는 것이 아니냐. 쓸모없는 나라 좀 팔아먹었기로 서니 뭐 그리 잘못된 것이냐?”고 오히려 핀잔을 듣던 폐주(廢主)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는 폐망 후, 본인의 경솔함을 깨닫고 후회하였지만 이듬해 망국의 한을 감당하지 못한 채 북망산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고 말았다.

살아서는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분별력과 판단력이 부족했던 의자왕!

그에게 오늘의 역사는 가장 무능하고 어리석은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말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역사 앞에서는 정의로운 세력인 냥 또는 충신들의 집단인 척 호들갑 떨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 판단은 지금의 당신들이 아니라! 역사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백제의 교훈을 곱씹어 보는 것은 어떨까!

여보시요! 행여나! 당신도 간신(奸臣)의 꼬리표가 달릴지 모르니, 조심하시오. 꼭 명심해야 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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