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중, 아버지가 남긴 글은 아버지의 마지막 자취였다.

유년의 시절을 보낸 고향 함흥에서의 일제하 식민통치, 한국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난 긴 유랑의 시절을 보낸 대구, 부산과 인천,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 서울에서의 생활, 아버지는 나를 홀로 돌보며 어머니의 몫을 다했다.

아버지의 역사는 이처럼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 있다.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과 집단이 관계된 사회적인 사건이라는 의미를 심어주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란 내 앞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의 삶에 스스로의 창조적인 삶을 더해 만들어지는 것.

아버지는 나에게 깊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평범했든, 특별했든, 아버지의 한 생애를 정리하는 일이 나에겐 소주 한 잔 마시며 위로받는 것보다 의미 있고,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어 더 의미가 있다. 이후로 나는 글만 쓰는 삶이 됐다. 나에게는 사회적인 이름이 아닌 새로운 이름을 부르는 일이 글쓰기이고, 그게 앞으로의 새로운 삶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거인의 어깨 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어깨 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불확실한 것, 잡히지 않는 것으로 다가가 헤매려 한다.

어머니 사별 후, 17년 만에 아버지가 처음 나에게 남긴 말이다. 섬세하게 아버지에게 위안을 해주어야 하는데 자주 막혀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두 주체가 만나면, 꼭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에요.”
“주체는 각각 굴러오는 바퀴가 되고 두 바퀴는 충돌할 수밖에 없지.”
“…”

“갈등 없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건 미련하다는 생각이 일어날 만도 한데, 너는 어떠냐?”
“사랑에 빠지면 자신들의 사랑에는 끊임없는 축복이 내릴 거라고 기대하죠.”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난 거라고 여기게 돼.”
“나에게만은 그런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사랑에 빠진 거라고 자부심을 갖죠.”
“그렇게 될 수가 없어. 말다툼이 일어나면 그냥 멀어지잖아.”
“…”

“자, 이제 다른 누군가와 다시 시작하자! 내가 여기서는 얻지 못했던 이상적인 사랑을 찾아서!”
“그런데, 진실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은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야.”
“사랑은 지속적인 작업이죠.”
“끊임없는 노동이야. 아침에 일어나면 앞에는 사랑하기 위해 다시 창조하고, 다시 규정하고, 다시 조정해야 하는 24시간이 놓여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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