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문화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는 일본이라는 나라보다는 파시즘의 잔재이기 때문에 문제야.”
“민주시민의 교육으로 해소되어야 하고마, 유신체제 하에서 오히려 일제의 군국주의, 군사적 집단훈련이 강화돼 부활했제.”

“학교 현장에 뿌리내린 일제의 위계적인 틀이 교육개혁 움직임에 걸림돌이 돼고있어.”
“위로부터 일률적으로 모든 학교에 시달하는 교육의 틀 안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크지 않제.”

우리 교육에서 ‘어디까지가 일제 잔재인가’라는 부분은 여전히 논쟁지점이다.

해방 후, 우리 교육개혁이 식민교육에 대한 반성적 성찰 없이 기존의 틀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실제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들을 배제한 결과 식민지 교육 잔재 극복에 한계를 드러냈다.

“아버지는 ‘일본사회가 최근 보수화하며 퇴색되긴 했지만, 최소한 전후 초기 일본에선 제국주의에 대한 교사들의 반성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민주주의 국가로 가야 한다는 지향점이 명확했던 반면, 우리는 교육의 지향점보다 민족정체성 회복이 먼저였다’고 진단했다.

“일제가 남긴 것에 대한 성찰과 대안적인 교육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진정으로 식민지 교육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봉준이는 점차 학교 일에 익숙해지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학이 안고 있는 여러 심각한 문제를 직면하곤 했다.

재단관계자들의 친·인척 교직원들이 적지 않고 부장교사들로부터도 누가 누구와 만나, 무슨 얘기를 하는지 늘 감시받는 느낌이었다.

교사들은 대체로 위축돼 있고, 그러다 보니 학생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반항으로 나타났다.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행정실에 얘기하고 받아갔는데, 시스템 자체가 공공이익에 맞게 운영되지 못하도록 구축되었다.
 
너무 늦게 알게 된 차이점에 놀랐다. 점차 사회가 보수화 되면서 사학의 위치가 더 강해지고 교사채용 등 사학의 문제를 투명하게 고치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일은 아니었다. 돌아보니 사실 어쩔 수 없긴 했다. 몇 년간 교직 생활을 그만두게 된 것 말이다.

교장은, 이젠 교사들도 강자이니 사소한 잘못을 가만두면 안 된다는 기세였다. 저 불만에 대답하려고 여럿이 함께 ‘좋은 교사 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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