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얼마나 자주 땀을 흘렸는지, 홀로 사는 고독함 보다, 부지런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버지의 세상살이, 너나 할 것 없이 살아가는 삶도, 사회나 나라도 마찬가지리라. 아버지는 틈틈이 채소를 키우면서 농사일에 비우하며 한 개인의 내면적 성숙이나 인간 삶의 의미, 세상 속 진리를 이야기 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같은 주변 환경과의 관계도, 배려와 나눔을 강조하는 데도 채소를 가꾸는 일은 좋은 소재였다. 더 나아가 지배층과 권력자의 무능과 불통, 부정부패와 비리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하는 데도 채소 가꾸기는 제격이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땀 흘린 만큼 거둔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은 그 어디에서든, 어떤 일과 생각을 하든, 늘 되새길 만한 일이다. 그런데 말없이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봄의 비밀, 그 힘을 조용하게 곰곰이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매년 꼭 이맘때, 마당 한 켠에 모종을 심고 씨를 뿌렸을 아버지, 봄은 지난해처럼 마당을 이렇게 찬란하게 채웠을 텐데…, 씨앗을 심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릿하게 저려온다. 여러 굴곡과 파랑과 벼랑을 지나와서, 마음고생과 애태움과 노심초사를 지나와서 그 흔한 혼자는 진짜 혼자가 됐다.

아버지는 열심히 살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피란 왔다. 자립으로 재혼하여 나를 낳고, 알뜰한 살림살이로 나를 키워냈다. 또,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세월을 따라 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기력이 다한 아버지의 마지막 가장 가까운 친구는 누굴까? 바로 텔레비전이다.

언젠가 내가 “무엇을 하며 지내세요”라는 물음에, “으, 응, 텔레비전봐. 텔레비전이 자식이고 친구지”라고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도 알고 보면 진정한 친구는 아니다.
소비능력을 가춘 젊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친구일 뿐이다. 젊고, 잘생기고, 부유한 사람들의 연애담과 얽히고설킨 애증사, 젊음을 내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연예인들의 선정적인 몸짓과 시시덕거리는 말장난 차지다.

그런데도 나는 안쓰럽게 바라볼 뿐, 무엇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뼈와 살을 흔쾌히 내주었다. 오직 자식만은 밥 먹이겠다는, 그 종교를 완성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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