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충분한 이유를 단시일 내에 설정하지 않아.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쌓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어떤 이유를 만들어 줘. 한 인간에게도 그런 보수주의가 필요해. 인간은 마치 바닷가의 밀물과 썰물이 오래 오래 되풀이되는 것처럼 일정한 일을 반복함으로써 장엄한 업적이 돼. 오랜 시간은 죄수가 교도소에 갇혀 있는 시간으로도 뜻이 깊은 것입니다.

삶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삶의 기간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종교는 언젠가 다쳐올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의 일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넓은 물질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삶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 갓 숨이 끊어진 생명체가 있다. 생명의 기운은 사라졌지만, 육체만은 살아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체온마저 따뜻해 마치 깊은 잠자리에라도 빠진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몸은 식어간다.

아직은 영하의 바람이 불고 눈도 오지만, 조금씩 봄기운이 느껴진다.
지금 추위를 견디며 겨울나무 안에서 꽃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수액에게 햇빛과 공기와 바람은 얼마나 멀게 보일까. 가지로 올라가 꽃과 잎으로 스며들어 마음껏 광합성을 하고 바람에 흔들릴 시간은 얼마나 까마득하게 느껴질까. 연애를 하면 좋은 점이 분명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연애가 삶의 전부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니까 연애해’, ‘연애하지 않는 너는 불쌍해’로 넘어가는 것이 연애지상주의의 문제점이다. 나는 이 연결고리를 끊고 싶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를 모두 무죄로 석방하고 자한다.

미래마저 불투명한 세상에서 내가 지금까지의 노력으로 취득한 지식마저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 아닐까?

그날 밤 기름진 술을 먹고, 독한 백주를 들이켜고, 카스의 거리를 헤맨 뒤, 알딸딸한 기분으로 침대 머리맡에 앉아 연필에 침 묻혀가며, 모텔 메모지에 갈긴 흔적은 무엇이었던가. 고작 씁쓸한 추억일 뿐이었나.

마치 폐허에 버려진 느낌!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끔은 너무 어렵다. 멀구나! 아득하구나! 이 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 보잘것없는 연필에 침을 묻히며, 사각사각 글 쓰는 마음. 나는 더 이상 빛을 되찾을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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