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그랬다. 남쪽나라는 30만명이 굶어 죽은 것은 전적으로 북쪽나라 지도자 탓이고 남쪽나라와 이웃나라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아주 고소하다고 박수를 쳤다.

어쨌든 그 후 남쪽나라 순희는 다시는 북쪽나라 외할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북쪽나라 철수도 남쪽나라 고모할머니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절망은 절망적인 현실을 넘어서 있는 어떤 불가피한 탐구입니다. 이런 시지프스적인 고뇌를 의식하지 않고 희망을 말하는 일이 얼마나 허황한 일이라는 것을, 희망이 얼마나 어려운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과 일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절망을 확인함으로써 내 얼굴과 내 시대를 통해서 희망을 보여주는 이론이라고 종말론은 인간의 한계로서 구원을 찾아줍니다.

모두가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내면에 숨어있는 분단지향의 속성, 나의 속에 웅크리고 있는 독재와 식민지지향의 근성, 파벌근성 이런 것들을 부릅뜬 눈으로 응시하고 도려내지 않으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들어 생명의 새싹을 일깨워내기 위해서는 처연한 상처와 아픈 가슴들을 척박한 대지에 뿌리내려 스스로 봄을 불러들여야 한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질서, 대순환 당신도 결국 썩어서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나는 전위적인 것, 급진적인 것을 인정합니다.

나의 생리는 그런 것과 밀접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위적인 것, 급진적인 것이 정치적 좌파(左派)로 나타날 때의 오류를 나는 거절합니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 15세를 폭군으로 과장했습니다. 그는 엄숙한 대관식전에서 왕관을 머리에 씌워주는 대사제(大司祭)에게 “아파요!”라고 말한 왕이며, 왕위에 대해서 신이 내려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버리고 왕을 그만 두기를 바랐던 왕이었습니다.

그를 장기 집권의 폭군이라고 한 선동이 프랑스 혁명의 분위기였습니다. 레닌은 알렉산더 2세를 독재자로 성토했지만 그 황제야말로 우유부단한 의지박약의 선의 때문에 실각된 것입니다.

그러나 레닌은 짜리즘을 규탄하고, 그 자신이 짜리즘을 박탈해서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으로 프롤레티아트를 정복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 속의 진실을 알게 될 때 나는 전위적이며 급진적인 지식인들의 딕션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따라서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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