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지켜보아도 움직이지 않는 무엇이 없습니다.

아, 하나 있습니다. 나비입니다. 폐결핵에 걸린 덥수룩한 수염의 모던보이, 이상(李霜)은 부잣집 꼽추화가 구본웅과 어울려 밤새 술에 절어 기방을 전전하는 기행청년으로, 알쏭달쏭 아라비아 숫자와 건축·의학 용어로 해독 불가능의 문구로 시를 쓴, 이 땅 최초의 모더니스트 작가였습니다.

이상(李霜)은 오만과 천재성에서 비롯한 자의식으로 식민지가 되던 해에 태어나 스물일곱 죽을 때까지 근대라는 화두에 온몸을 부딪치며 살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말년에 자신의 문학을 펼칠 포부 하나로 도쿄로 건너갔지만, 오히려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한 조선 사람)으로 체포돼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멜론이 먹고 싶다’고 외치며 짧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꿈에서나 그려 보았던, 아니 꿈에서조차 떠올릴 수 없었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곁에 꼭 있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진정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들마저 잊거나, 잃어버리거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 잊어도, 다 잃어도, 다 버려도 우리 곁에서 나비마저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먼 이국(異國)으로 숨어든 나비가 다시 되돌아오기에는 길이 너무나 멀고 험했습니다. 단절된 허공을 딛고 넘어올 수 있는 나비의 징검다리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옳게 숨 쉬는 길이며, 나비가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봄이 나비조차 만날 수 없는 봄이라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 더군다나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안쓰럽습니다.

날개를 사서 읽었다.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에 설렘과 술렁임이 돌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내 지적 수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이었지. 아내가 화대로 받은 돈을 고마워하며 벙어리저금통에 모아두고, 아내 몰래 아내의 방에 들어가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맡았고,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며 아내의 체취를 그리워하는 장면은 눈시울이 뜨거웠어.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그가 우리에게 다가와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를 외치며…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이리 날아와 줄 만큼 노랑나비와 흰나비가 가까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상이 천재임을. 이상의 ‘날개’만으로도 한국문학사는 충분히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한국어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말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소설이 ‘날개’인 것임을, 그리하여 또 더 말해서 무엇 하랴.

‘날개’가 문학에 대한 모든 것이 저장된 거대한 문학적 보물 창고임을, 이 정도의 문장을 쓸 수 있는 자라면 필연적으로 객혈과 함께 요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내가 보다 더 어리고 미숙하던 시절. 한국근대소설 중에서 이토록 미끄러우면서도 일상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을 만날 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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