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신성, 그 신성을 사랑하는 도취의 그녀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의 생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젊고 어린 날 죽음의 고통까지 겪어야 했던 굴곡진 운명 속에서 나의 운명이 만들어집니다. 나와 연결되는 자, 그 비극적 운명을 나눠 가져야합니다.

소설 ‘데카메론’에서 보카치오는 인간의 육체와 욕망을 죄의 근원으로 규정한 중세 교회의 의식을 벗어나 인간을 욕망을 가진 주체로 등장시켰어. 혼외정사, 동성애, 다자간의 사랑 10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보카치오는, 인간이 육체적 욕망에 충실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고 역설하지…

아무래도 금욕주의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도달한 욕망을 내버려두고 단지 지켜보는 것이야. 타자의 발견 또한, 어쩌면 나와 당신 사이의 간격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나 바깥에 있는 그 모두를 용인하는 것일지도 몰라.

상대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는 가학적 성애인 사디즘의 어원이 된 인물인 사드는, 기존 성도덕에 도발적으로 도전함으로써 현대 욕망이론의 문을 열었어. ‘소돔의 120일’을 비롯해, ‘미덕의 부랭’, ‘악덕의 번영,’ ‘규방철학’ 등 그가 쓴 책들은 죄악과 금지의 상징이었어.

종교와 도덕의 이름으로 덧 씌워진 위선의 껍질을 벗고 성의 욕망을 제한 없이 드러내라고 말해. 그러면서 끊임없이 정욕을 정치, 사회적 문제와 연결시켰어. 정욕과 법률 가운데 어느 것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했는지 생각해봐요! 근친상간 등 문명에 의해 터부시된 원초적 행동 방식을 되살림으로써 도덕률에 균열을 내고자 했어!

나는 이 시도 자체를 수용하진 않았어! 그럼에도 욕망이란 법의 언어가 금지하는 몸의 언어라고 해! 난교를 통해 국가체제에 의한 규제와 강제에 반발하는 의미를 가져! 그건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야.

섹스는 인생의 맛을 비워 놓은 자리야. 나는 불편했다. 정말 이상했다. 부재! 충격이었다. 섹스는 아름다운 동시에 쓸모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혁신적이어야 한다. 시각과 청각의 충돌! 그 어긋남에 매우 심란했다.

기이한 것과 익숙한 것, 역겨운 것과 사랑스러운 것이 동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이 불편했다. 폭력과 섹스, 정신착란이 뒤섞인, 그러나 감미로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흐르며 귓볼을 간질이는 몽환적 분위기도 감성에 교란을 일으켰다.

그보다는 아름다움의 결합이 빚는 괴기스러움이 오히려 더 본질을 잘 드러낸다. 감미로움 때문에 더 선명해진, 친숙한 것과 섞이고 일상에 스며들어 은폐되고 있어도 드러나고야 마는, 내재한 감춰지지 않는 혐오감이야말로 무죄다. 현대자본주의가 성을 어떻게 억압하고 상품화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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