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연속된 비참함에 넋이 빠진 사람들은 제 말을 하지 못하고 어눌함과 악다구니 사이를 왕복했다. 험악함을 표현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고 침묵을 택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다.

나의 입술은 세 겹의 억압에 눌린 채 짓이겨 졌다. 글씨라고 적고 있지만 내가 실제 다루는 것은 독해(讀解)가 아니라 발화(發話)다.

현실의 억압으로 자물쇠 걸린 성대를 가진 한 소년이 언어를 성숙시켜 자유롭게 말하기까지의 성장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조금도 순탄하지 않고 상실이 연이어 이어지는 극단적 비극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행복한 순간은 띄엄띄엄 오지만, 비극적 사간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법.

현실의 무릎이 꺾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일어섰다. 현실의 언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사랑의 언어를 통해 화해의 실마리를 이룩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거기에 황금빛 새를 기르고 있다.”
“…”
“절망이란 정성스레 돌보던 황금빛 새가 날아가 버리는 일이야.”

영혼이 무너져 황폐한 자리에 문학은 언어로써 정원을 가꾸어 황금빛 새를 되불러 들였다.

“아버지, 우리 둘이 노루너머 가서 살까.”

노루너머는 아버지 이북 고향을 건너는 임진강 길목이다. 돌아누운 아버지를 흔들어 나는 태어나 처음 마음을 담아 말했다. 어머니와 살고 싶지만 아버지를 택한 자기희생의 언어를 통해 나는 터전이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 희망의 시간을 발명했다.

언어란 황금빛 새를 품고 있을 때에야 제대로 서는 법이다. 삶의 비극에 억눌린 언어를 살리는 법을 알려주기에, 나의 아름다운 유년은 문학의 일을 환기하는 훌륭한 상징이 되었다. 

사실 친하게 지내는 봉준이가 한때 결혼해서 잘 사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했어. 일과 가정을 다 책임 있게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 두 마리 토끼를 다 쫓을 자신이 없어.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고 나도 동의 해.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갖도록 노력해야 해. 섹스는 결국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타향의 서늘함 일 뿐. 내 빈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환상일 뿐. 그것은 언제 내가 살았던 본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하나일지도 몰라.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