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깊이 한숨을 내쉴 뿐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조롱의 눈빛이었다.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지폐를 툭, 방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문을 확, 밀치고 나갔다. 쿵쿵, 발걸음이 울리며 사라졌다. 이렇게 조용할 수가. 서울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고요. 그 고요 속에 몸을 맡기면, 저 높은 트레르가스 타인에 들어간 아르네 네스처럼 살지 않아도 하늘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저녁마다 빨간 벽돌을 더 붉은 햇살이 물들이는 세상의 신비를 엿볼 수 있다.

남성에게 자존심은 방패다. 남자의 자존심은 자기 영역 가치관이나 가족을 지키려는 감정이다. 누군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려 할 경우 강하게 반발한다.

남자는 독립을 위해 자존심을 발동한다. 여성에게 자존심은 방패이면서 칼이다. 여성은 독립이 아닌 관계를 위해 자존심을 이용한다.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때는 자존심이 방패로 활용된다. 그녀도 우월함을 확인하고 싶어 날카로운 칼이 되었을까?

나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실현 당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고 싶어서’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나 역시 나름 삐딱하게 사느라 힘들었다. 정확히 고2 겨울 방학때였다. 까뮈가 나를 찾아왔다. 검은 트렌치 코트에 머리를 위로 넘겨 빗어 창백한 얼굴에 담배를 물고서였다.

나는 그에게서 데카당스를 읽었고, 허무를 읽었고, 자유의 빛을 보았다. 그리고 ‘이방인’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는 소설가, 혹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 후레새끼가 되어야 한다는 어떤 평론가의 명제를 생생하게 떠올려주었다.

내 속의 위반과 일탈, 저항에의 가치는 진정 까뮈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지프스 같은, 반항인 같은 삶. 그건 바다. 태양. 뫼드소. 내가 껍질을 깨고 나오던 그해 겨울.

내 사랑 카프카! 다시 대학 1학년 시절 나는 온통 카프카에 빠져 있었다. ‘변신’에서 비롯된 그에 대한 관심은 이후 ‘소송’을 거쳐 ‘성(城)’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나는 카프카의 ‘성’을 헌책방에서 단돈 1,000원에 구했는데, 유명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으로 번역본이었다.

먼지를 흠뻑 덮어쓰고 있던 그 낡은 책의 먼지를 털고 첫장을 넘겼을 때, 거기에는 불안과 공포의 눈동자를 자신의 책을 펼치는 독자를 향해 쏘아보는 카프카의 사진이 있었다. 질겁하면서 펼친 ‘성’의 첫문장. ‘마을은 깊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조금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성은 안개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따라서 큰 성이 있는 것을 알리는 희미한 등불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는 문장을 읽을 때, 나는 내 머리 속에서 한개의 오렌지 빛 가로등이 밝혀짐과 동시에 밀가루만큼 희고 보드라운 눈송이가 쏟아져 내림을 환각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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