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10개도 전혀 아깝지 않은 책이며,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읽어야 되는 책이다.

책을 읽은 후 이렇게 꾸역꾸역 주절주절 쓰는 이유는 책 한 권을 읽고 난 후, 책에 대한 감정을 느낀 그대로 감정이 사라지기 전 폭풍같이 써서 그때 감정을 훗날에도 느끼고 싶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

책에 대한 리뷰도 아니고, 요약정리 또한 아닌, 그렇다고 친절히 소설류의 줄거리를 쓰는 것도 아닌, 단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마구 쓰는 것이다. 누가 모라고 하든지 말든지.

그런데 ‘산둥 수용소’를 읽은 후 무엇인가 쓸려니 무척 조심스럽고, 소심해진다.

한번 잘 써서 이 글을 보고 다른 사람도 산둥소용소를 읽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마구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한번 잘 써 보려하는데 생각 보다 쉽지 않다.

아는 지인이 읽고 있던 책 이어서 몇 장 떠들어 보니, 2차 대전 중 ‘포로수용소’에서 작가가 느낀 점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치사해 지는지를 보여 주는 책이다.

그러면서 얼마 전 읽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비슷한 내용이겠구나? 생각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을 때, 정말 극찬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장소적인 배경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고 ‘산둥 수용소’는 책 제목과 같은 중국의 ‘산둥’이다.

또한, ‘죽음의 수용소’의 작가 ‘빅터 프랑클’의 직업은 ‘심리학자’며 ‘산퉁 수용소’의 작가 ‘량킨 갈키’는 ‘신학자’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수용소를 배경으로 쓰였으나 상황이 다르다.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에 있어서는 즉, 수용소의 강도 면에서 보면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압도적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언제 갑자기 ‘가스실’로 들어가 죽을지 모르고, 아침을 먹던 엄마가 점심엔 보이지 않아 보니 가스실에서 죽어 있는 등 생사의 갈림길에 방치되어 있는 반면, 산둥 수용소는 일종의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극기 훈련 같은 분위기다.

이점 때문에 초반 독서할 때 ‘산둥 수용소’ 여기 수용소 맞아? 수용소 안에 매점도 있고, 좁기는 하지만 가족들끼리 살 수 있는 공간도 있고 학교, 병원 등 풍족하지는 않지만, 있을 것은 웬만큼 다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수용소’ 라면, 아우슈비츠 정도 되거나, 대한민국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잡혀 들어간 ‘서대문형무소’ 정도는 되야 수용 축에나 들지 이게 무슨 수용소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50쪽 정도 읽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있을 건 웬만큼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관점이다.

즉, ‘풍족하지’ 않다는 것이 한정된 공간과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해 남들 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인간의 기본 욕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주 없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힘들지만, 많은 인원에서 적게 있다는 것 또한 힘들다.

책에서 ‘한계 상황’에 대해 작가는 ‘원죄’라는 신학적 표현을 썼는데, 이기적이며, 국수적인  형태로 자기 합리화를 통해 잘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합리화를 통해, 자신의 ‘이성’을 위로한다고 잔잔히 이야기 한다.

또한 2016년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왜, 개독교(?)라는 능멸적인 용어를 받는 이유를 1940년에 작가는 미리 수용소 안의 세상을 통해 담담히 밝힌다.

1940년대 산둥 수용소 안의 상황과 2016년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같으며, 그 속에 벌어지는 좀 더 편안한 삶을 위한 처절한 인간 몸부림에 심금을 울린다.

책 한 권을 달달 외우고 다니며 잘난 척할 때 써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며 신학자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어렵지 않게 담담히 독자를 무시하지 않는 진행으로 묵묵히 써 내려갔던 것이 많은 감동을 주는 책이다.

400쪽이 넘어 그동안 독서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은 읽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일 년에  한 권 정도 못 읽겠어? 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읽는다면, 책의 마지막 쪽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