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구입해 책과 대면 할 때, 책의 외모가 520쪽이라면 두렵다. 이 두꺼운 책을 정말 다 볼 수 있을까? 걱정을 마음에 품으며 쌀 한 가마니 보다 더 무거운 책 첫 장을 어렵게 넘겼다.

국내작가 책을 읽고 있을 땐 행복하다. 재미있고, 유익하며, 역사에 관심 있는 본 기자로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 소설이기 때문이다.

번역이라는 도구로 한번 걸러 나오는 느낌이 아닌 작가와 독자가 1대1로 느끼는 특이한 감정은 번역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국내 작가에게만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한복 입은 남자’를 읽을 때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소설이지만 동시에 넌픽션 소설이라고 책은 설명한다.

그럼 넌픽션(nonfiction) 소설이 무슨 말이냐? 할 것이다. ‘픽션(fiction)’은 ‘허구’며 그 앞에 ‘부정’의 의미인 ‘넌(non)’을 붙으니 ‘허구’가 아닌 ‘진짜’가 된다. 명사로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가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로 이야기를 꾸며 낸 산문체를 소설을 논픽션 소설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앞뒤가 잘 안 맞는 말이다.

‘한복 입은 남자’를 읽을 때 개인생각은 ‘사실’ ‘실화’의 이미지는 지우고 단지 소설(꾸며낸 이야기를 읽는다)을 읽는다고 생각 해면 좋을 책이다. 소설 한복은 입은 남자(이후 한입남)로만 보면 책을 참 좋은데 내용이 사실인가 아닌가에 대해 고민 또는 아는 지인들과 괜히 논쟁 하지 말라는 말이다.

한입남은 잘 기획되고, 준비 기간이 치밀한 이상훈 작가의 소설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방영된 대하 드라마 대장금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에 수라간 나인 출신이 훗날 내 의녀가 됐다는 한 줄을 가지고 작가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무한 상상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 사실이냐 아니냐에 대해 논한다면, 입만 아프고, 배만 고프다. 소설의 내용은 조선 초 세종대왕 시대 장영실이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다.

천민 출신 장영실이 어떻게 세종대왕의 측근까지 갈 수 있었으며, 세종대왕의 ‘가마사건(왕이 탄 가마가 중간에 부서지는 일 이며 실록에도 실제 기록 되어 있음)’이후 장영실 행적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작가적 의문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세종대왕은 장영실의 재능과 능력이 조선에 국한 되는 것이 안타까워, 구국의 결단으로 장영실은 유럽으로 보낸다.

최초의 조기 유학인 셈이다. 1300년대 조선에서 유럽까지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사실이다.

그런 문제를 작가는 역사 속에서 찾는다. 그런 인물이 중국의 ‘정화’라는 인물이며 그는 세계 최초로 세계여행을 한 동양인 정도로 간략하게 설명 할 수 있다.

정화원정대의 배를 타고 장영실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고 그 곳에서 꼬마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만나 그의 재능이 비상함을 알고 제자 삼아 가르쳐 결국 다빈치의 영향으로 서양 과학 발전이 시작됐으며, 결국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의 정신적 기초가 됐다. 줄거리를 보면 픽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번 생각해 보면 기분 좋아지는 상상이다.

작가는 21세기 모든 과학 문명과 사상이 미국과 서 유럽의 일부 국가의 치적인 것 같이 배워 왔으며 이런 부분이 잘 못 됐으며 동양의 과학기술과 사상도 세계사에 많은 부분을 차지해야 하는데 그런 점이 무시되는 풍토를 비판 한다.

지금까지 동양의 전문적 과학과 이념의 치적은 통념적으로 무시, 보류 됐으며 과학의 경우 서양에 비해 동양은 늘 열등 하는 생각을 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점을 독자에게 도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잘 알려진 장영실이라는 실존 인물을 통해 동양 주도의 세계 과학사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쓴 것 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뿐 아니다.

인문학의 기본 원류를 그리스의 3대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 되며 그것이 전부 인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비슷한 시기에 공자, 맹자, 순자의 사상도 그리스 3대 철학자 못지않다.

‘그랬으면 좋겠다’ 뿐 ‘그렇지는 않다’인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책에 나오는 ‘그렇지 않다’의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역사는 기록의 결과다. 기록자가 어떠한 상태며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역사의 질은 근본에서 부터 달라진다. 한입남이 장영실이라는 역사적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 할 뿐 아무 근거나 고증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동경 하지 말아야 된다.

정화와 영실의 경우, 영실이 중국을 자주 왕래 하니까 만나지 않았겠냐는 막연한 생각일 뿐 정화의 배를 타고 유럽에 갔을 것이라는 것은 지극히 소설적 발상이다.

동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정화와 영실이 만났을 것이라는 것은 개연성이 많이 부족하다. 또한 조선의 국왕인 세종이 영실을 구하기 위해, 개인의 사제를 털어서 정화의 원정에 자금을 지원 했을 거라는 내용 또한 지극히 소설적인 발상이다.

비차(飛車)의 경우도 다빈치의 스케치 기록만 남아 실물에 대한 정보 없이 조선의 비차(飛車)와 비슷하기 때문에 올라가다 보니, 영실 형님이 원조가 아닐까? 하는 것은 작가적 상상력이다.

토스카넬리의 도움으로 피렌체로 피신한 영실이 형 때문에 교황과 전쟁을 했다는 부분도 소설일 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양쪽 중 한곳이라도 장영실에 대한 언급이나 실명은 아니더라도 동양이라는 비슷한 기록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쟁을 장영실이 만든 신기전 덕분 승리 했다는 부분은 지독한 작가의 상상이다. 곧 영화로도 제작 된다니 500쪽이 넘는 양이 부담스럽다면 영화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