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얘기를 듣기도 했다. 어떻게 살았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래서 였을까. 한이 많았다. 한이란 것이 그 속을 들여다보면 까맣게 타버린 가슴앓이의 환부 아니었던가. 말 못할 사연들이 한이 없었다.

한이 많은 만큼 오해도 많았다. 말이 없으니 눈치로 살았고, 눈치로 살다 보니 오해가 잦을 수밖에 없다. 낯빛을 살피고, 눈매를 훔쳐보고, 일거수투족에 배어나는 체취를 맡았다. 봇물처럼 터져 나온 욕구의 분출은 한스러운 사회의 내면을 거침없이 보여주었다.

아! 그랬었구나! 그토록 많은 분노와 증오가 쌓여있었구나! 이념의 대립과 갈등도 이처럼 깊은 것이구나!

한 세대 이상을 흘러온 민주화의 열기는 우리 사회의 무거운 족쇄를 녹였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랑이 차오를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그 말은 빛이 되었고 진리가 되었고 생명이 되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해지는 존재다. 하나의 말을 들으면 하나의 빛을 보는 것이다. 아, 말과 침묵은 서로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언어가 아닌 ‘잡음어’에는 침묵이 없다.

말은 삶을 모두 통과한 후 죽음으로 들어서기를 원한다. 삶에는 말을 위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하여 인간은 말로 인하여 불멸이 된다. 무섭지 않은가.

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의 매매와 관련된 매각자, 매수자의 불평등적 관계는 사회에 내재된 근본적 모순으로 인한 것이며, 이러한 모순에 대한 고민 없이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한 평등적 매매 주장은 허구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너의 시대정신과 긴장감을 꾸준히 유지해온 비판의식을 난, 높게 평가해.”

봉준이는 자기와 다른 것, 잘 모르는 것이라도 배척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한다.   

 “하! 하! 기게 바로 니, 예술세계에서는 큰 미덕아이가?”

그는 별 볼일 없는 인간, 나에게 모험심과 도전정신을 갖고 살도록 늘 일깨워준 동료이자 좋은 친구다.  “내 작품은 전통과 정서적으로 예술문화의 문턱을 낮추지 못하고 있어.”

 “기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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