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펼쳐진 사태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차갑게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다. 사태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고 나의 관심과 편견 때문에 아주 좁은 길로 자신을 투영해서 본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상처가 여기서 출발한다.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치유가 시작된다. 왜 그런가.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장자도 똑같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 자기중심성, 그게 모든 병의 근원이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깰 것인 가다. 그걸 깨는 비법은 무엇인가.

노자와 장자는 ‘자망(自望)’이라고 했다. ‘너 자신을 잊으라’,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잊을지 구체적 훈련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훈련법이 가장 풍부한 건 불교다. 대신 출가자를 위한 전업훈련법이 많았다. 너의 상처는 너의 좁은 자아로 인해 생긴 거다. 좁은 자아를 깨라.

사회적 악이라는 것도 너의 작품이다. 너 같은 자아가 충돌해 생긴 거지. 다른 사람이 준 것이 아니다.
네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그래야 네 상처도 치유되고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 너는 피해자만이 아니고 가해자이기도 하다.

선비들은 어땠나.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문안하고 독서와 명상을 했다.
아침부터 잘 때까지 일과표를 만들어 내가 천리(天理)와 함께 있으려 노력했다. 그게 자아를 깨는 것이었다. 그 중 핵심이 뭔가. 독서와 명상이다. 그걸 통해 궁리(窮理)·이치를 곰곰이 따져보며 연구를 했다.

 “맹자는 말했어. ‘개나 닭이 집을 나가면 온 동네 사람을 풀어서 찾는데, 마음은 잃어버려도 찾을 생각을 않는다’고.”
 “마음은 굽어져도 고칠 생각을 안 한다, 이 말아이가.”
 “그래, 고전을 보고, 경전을 보며 궁리를 하는 거야.”
 “내처럼 굽어진 마음을 펴기 위해서인기가?”
 “궁리를 하면 바닥까지 가게 된데. 그래야 사태를 제대로 알 수 있고 진정한 혁신도 나오는 거야.”
 “하! 하! 공자님 말씀, 잘 알겠심더! 내 우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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