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적군파 역시 60년대 말 유명했잖아.”
“베를린 자유대학 학생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제. 기래서 역테러와 폭력에 나서 방화, 테러, 살인을 일삼았고마.”

고독이 낳은 지독한 오만, 외로움의 질병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래, 테러집단으로 기록됐잖아.”

그 뿐이다. 모든 폭력에는 이유가 없다. 오로지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 말 같지 않은 말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갑자기 당신이란 호칭이 튀어나왔다. 다소 현학적인 측면을 감안하더라도 이미 한 세계를 다 산 사람처럼 나는 고독해진다. 이 얼마나 참혹한 찰나인가.

뜨신 국물과 어묵의 한 양푼에 담긴 바다 생선들이 넘나든다. 눈길에 미적미적 객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술 방은 늦은 밤까지 훈훈했다. 닭발도 그렇지만 뼈를 바수어 만든 누군가에게 내 뼈를 내, 너 주듯, 뜨거운 전부를 나누며 참세상을 꿈꾸게 한다. 그대 배꼽까지 따뜻해지는 매운 국물을 나누듯…

“어느 편이라뇨?”
“우리가 남이가?”
“아무도 남이 아닌 세상! 이 국물 그릇 속에 있습니다.”
“정체를 밝히라니?”
“종북이니 무시기카면서 아무데나 들이 데면서 나라꼴이 뭐꼬? 구한말, 조선시대 때 난리가 일어났던 임진, 정유년 때 비슷하게 몰아가고 있고마!”
“매국을 애국으로 위장하고, 국민을 적으로 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보다 내밀하고 깊은 곳에서 사로잡는 감정은 오히려 어떤 불가해한 쾌감에 가깝다.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자신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누구나 자신을 경험한다.

그러나 자신을 경험한다는 말은 자신과 대면한 모든 세계와 현상을 자신의 생각으로 재배치하고, 재해석하며, 그것을 스스로에게 다시 다가오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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