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최태호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최태호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최태호
항상 1등만 하는 아이가 있었다. 부모는 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하버드 대학으로 유학보내기로 했다.

SAT도 최고 등급을 받았고,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물론 성적은 항상 1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자신있게 하버드에 원서를 제출했고, 합격통지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다.

불합격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이 아이보다 성적이 낮은 아이들도 합격했는데 이럴 수가 없다는 생각에 총장 면담을 신청했다. 불합격한 이유는 간단했다. 하버드 대학교 의과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봉사활동이나 헌혈 등 타인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른바 스펙으로 공부하는 것에만 치중했지 인성을 도외시했던 것이 문제였다. 공부는 잘 하지만 의사가 되어 인술을 펼치기에는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이 총장의 대답이었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모두 이러한 현실 속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회초리를 놓은 지 오래 됐다.

흔히 교편(敎鞭)잡고 있다고 한다. ‘교편’이란 채찍을 말한다. 가르치는 채찍이다. 그래서 교편은 잡고 있는 것이다. 교편을 놓으면 교육이 바로 설 수 없다. 요즘은 학생들이 교사의 체벌을 유도하고 동영상으로 찍어 교육청에 신고한다고 한다. 교권이 이렇게 실추된 적이 없다. 교사는 교사라는 것만으로 존경받아야 한다.

물론 개중에는 교사답지 못한 교사도 있다. 시험만으로 교사를 선발한 결과다. 이에 대한 토론은 다음으로 미루고 교편에 관한 이야기만 해 보자. 교권이 상실되면 아이들을 지도할 수가 없다. 교육이란 적당한 통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율과 방종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적당한 통제의 방법 중 가장 확실한 것이 감정을 배제한 교편의 활용이다. 수업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카카오 톡에만 빠져 있는 아이들이 많다. 지금의 사제관계로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
 
미국이나 독일도 휴대전화는 학교에 가지고 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제도적 장치가 완비돼야 한다. 휴대전화가 문제가 된다면 학교에서는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 장치를 설치해야 한다. 인조잔디 까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할 수 없도록 장치를 만드는 것이 더 시급하다. 

 명품인간은 명품교육을 통해서 만들 수 있다. 지금의 교육제도로 명품인간을 양산하기는 쉽지 않다. 국제화니 글로벌리즘이니 하는 것도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조를 바꿔야 한다. 교육은 항상 보수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정책은 미래를 바라보고 세워야 한다. 필자가 한국어를 공부할 때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한류가 세상을 뒤덮고 미국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유학 오는 시대로 변모했다. 지금에 와서 한국인이 한국어를 왜 하느냐고 비웃는 사람은 없다. 다문화 중도입국자학교나 한류문화학교, 국제다중언어학교 등은 미래를 위한 교육 방안이다.
 
이러한 교육도 적당한 통제하에서 교육해야 효과가 있다. 물론 칭찬만으로 하면 더욱 좋겠지만 청소년기가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질풍과 노도의 시대를 통제하지 않으면 한 세대 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체격은 커졌으나 체력은 저질인 학생들이 지나치게 많다. 덩치는 산만한데 뜀뛰기도 못하고 닭싸움도 못한다. 다리에 힘이 없어 50대 중반인 필자보다 산을 못 탄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산다. 필자는 박사학위 논문 쓰다가 운명을 달리한 친구들을 여럿 봤다. 지금도 공부하다가 실명 위기에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

가슴이 아프다. 한창 자랄 나이에 체력관리를 해야 한다. 지식만 들어 있는 사람은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필자가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마다 유도나 태권도 등을 지도하였다. 아침이면 재건체조라는 것을 하고 시작했다. 그것이 왜 사라졌는지 궁금하다.

아침에는 체조로 시작하고 방과 후에는 호신술도 배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기타를 배우면 평생 즐기면서 살 수 있는데, 그것을 배울 여유가 없다. 운동도 하고 예능도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기엔 너무도 멀다. 이젠 교육의 패러다임도 변해야 한다. 

체력을 단련하여 자신의 건강을 먼저 챙기고, 예능교육으로 인생을 즐길 줄 알며, 타인을 배려하는 인성교육으로 사회를 바로잡는 기초질서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을 얹어야 한다. 그러려면 대학의 입시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중등학교에서는 대학을 보내려고, 더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만 한다. 대학에 한 마디 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하버드가 왜 하버드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들은 인류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신입생을 선발한다. 공부만 잘 하는 편향된 지식인이 아닌 봉사와 배려하는 체력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사회의 리더로 만든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진정으로 사회의 리더를 기르고 있는가, 아니면 취업사관학교로 인성과 관계없이 지식이나 기능만 가득 찬 비인간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자. 

교육은 미래를 좌우하는 시발점이다. 바른 교육만이 나라의 미래를 밝게 한다. 계절이 돌아가는 길목에 서니 문득 사람냄새 나는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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