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짧은 커트머리, 헐렁한 윗도리에 치마는 금물.

그런데 여대생 다혜는 긴 머리에 레이스 달린 치마를 입고 다녔다. 자신은 ‘탐미주의자’라 믿었고, 우리는 ‘너 운동권 맞느냐’고 물었다.
 
‘소극적 운동권'이었던 설다혜를 기억하는, 몇몇 미묘한 순간들이 있다. 우리가 3총사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이념과 명분이라는 완강한 보도블록 틈새에서 수줍게 솟은 풀잎 같은 순간들.

친구들과 다르다는 건 조금은 외로운 일이다. 우리는 친구들과 공통점을 찾으려 했다. 친구들과 같은 간식을 먹고,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색깔의 청바지를 입었다.

친구들 사이에 나만 달라 보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친구들 사이에 숨어 있어도 모두 나만 보고 있는 것 같고, 나만 다른 것 같은 시절이었다. 맨 앞에 서면 눈에 띌까 봐 가운데 서보기도 하고, 맨 끝에 서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 서있어도 도드라져 보였다.

남학생들에게 돌 주워주다 경찰 사진에 찍혔다.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밤이 되니까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저쪽 유치장 남학생들이 간수에게 부탁을 한 거다. 미팅을 시켜달라고, 알고 보니 의대생들이었다.

봉준이와 나는 꾸짖었다. 정신이 틀려먹었다고. 그때 운동권 여대생들은 취업, 결혼, 운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20대 전반을 이 고민으로 보냈다. 지금의 20대는 이해하기 힘들 거다. 나도 나를 이해하는데 30년이 걸렸으니까.

우연히 들은 한 강의에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건 뭔가. 읽는 족족 더 큰 세상이 보였다. ‘나만 옳다’는 아집도 무너졌고, 너그러워졌다. 친구 사이도, 학업에도 도움이 되었다. 니체, 상고사 등을 폭 넓게 읽고, 고전을 연구하면서 세상을 크게 볼 수 있게 하는 생각하는 힘을 얻었다.

그게 희생이었을까. 정확히 맞는 단어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시대에 눌러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을 통해 나 자신을 치유하고, 나처럼 아팠던 청춘도 위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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