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딛고 동생 3명 대학 뒷바라지한 ‘작은 거인’ 이석성


“인장, 전통예술 계승·발전에 노력할 것”

공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번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이 곧 군자”라고 칭했다. 내 참모습은 내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지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데’ 달려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까짓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뭐 별 대술까. 상대의 허물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굳이 드러내려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우린 환경과 기회를 탓하지 않고 오직 한길을 걷는 사람을 ‘장인’이라 부른다.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의 성공을 도와주며 내 일처럼 기뻐해주고 그 어떤 이득도 바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린 ‘스승’이라고 부른다.

이석성(67)씨는 장인이자 스승으로 한평생 살아왔다. 그의 청출어람이 된 제자는 인장공예 명장인 유철규씨다.

사실 이 씨는 인장공예 명장 1호 최병훈 선생보다 더 일찍 인장공예에 입문한 선배라 할 수 있다.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 정교한 그의 손끝에 매료된 고 최정수 선생은 그에게 고인체 개발에 함께 할 것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훗날 이 서체를 바탕으로 컴퓨터 자동화가 시작됐다는 후문이다.

생업을 위해 시작한 인장공예였지만 그에는 명장, 그 이상의 운명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인장 기술은 장애를 가진 그가 동생 3명을 모두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던 위대한 힘이자 삶을 지탱해 줄 유일한 등불이었다. 

세종시 조치원읍사무소 앞 그의 조그만 가게(世宗社)에서 나눈 이야기다.


▲ 아직까지 손도장을 만드시는 분이 있다니 의외다. 왜 기계로 간편히 만들지 않나 
 전통을 찾아 가고 싶은 생각에서다. 도장 (인장)은 조각을 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유한 이름 석자 만큼이나 손맛들인 한획 한획 모든 열정을 담아 조심스럽게 새기고 다듬어 조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에 대한 믿음, 인장으로써 가치, 하나의 예술성으로 승화되길 기대하며 손도장을 한다. 어찌 보면 보석보다 더 값진 이름 석자를 담은 공간, 예술 도장이야말로 가정에 보물이 아니겠는가 생각할 때 어떻게 하찮게 새길 것인가!
 
▲ 글씨가 너무나 정교해 기계로 찍은 줄로만 알았다. 정말 손으로 만든었는지
손으로 새긴 것이 맞다. 오래전 아마 1990년대쯤 되지 않았나 싶다. 인장 기능사 자격증이 처음 도입되던 무렵까지도 인장 관련 책자 하나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 무렵 고인이 되신 우래당 최정수(연파) 선생님의 권유로 고인체본을 만드는데 함께 한 적도 있다. 이후 컴퓨터에 고서 글씨의 표본이 되지 않았나 싶다. 
 
▲ 인장명장 1호 최병훈 선생보다 더 일찍 시작했으니 명장특호라는 칭호가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최병훈 선생은 인장인으로써 존경하며 대단한 열정과 기술에 대해 같은 인장인으로 자부심을 느낀다. 사실 인장의 입문은 선배입장이지만 섬세함과 글씨의 흐름에 부러움의 대상이다.
 
▲ 명장 타이틀엔 관심이 없었나? 인장명장 유철규씨도 제자라던데
인제(유철규 인장명장.)는 나의 문하인이 맞다. 나로서는 명장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인제가 있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글씨에 흐름이 좋아 도장을 새기고 있을 뿐이다. 뿌리 없는 나무는 없지 않은가! 나 역시 故 박인규 선생님 문하에서 인장기술을 배웠고, 나 또한 명장 제자를 배출하지 않았는가? 인장기술의 맥을 이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 몸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 언제 무슨 일로 다쳤나? 사춘기 시절 어떻게 극복했는지
어린나이 8살 바로 전 어두운 저녁에 문지방을 넘다 뒤로 넘어진 그 날부터 약 2년간 누워 병을 앓고 장애를 갖게 됐다.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 하지만 10살이 되던 해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사춘기라는 단어도 몰랐다. 오직 동생 4명을 지키는 삶을 사명으로 알고 열심히 뛰었다.
 
▲ 19살부터 인장업을 시작했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19살에 되던 1964년, 故 박인규 선생님(제일인포, 대전 은행동, 현재 폐업) 밑에서 3년간 인장기술을 배워, 22살에 구 시청 앞 자리에 가게를 개업했고, 야학까지 병행했다. 이때만 해도 젊은 사람이 개인영업을 하는 경우가 드물어 혹자들은 미쳤다고도 했다. 그만큼 절박하고 숨가쁜 20~30대를 일에 전념하며 보냈다.
28년간 현 대전 중구청 앞에서 기관의 공인부터 각종 고무인 낙관 등 수 많은 일을 수주 납품했다. 1972년부터는 활판 인쇄를 겸했다. 사실 영업적인 인장일은 대전시가 대전광역시로 관명이 바뀌면서 직할시장 직인을 새겨 납품한 것을 끝으로 영업적인 인장일은 뒤로하게 된 것이 다행 아닌가 싶다. 명장 유철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쉬움은 그때의 작업 인명을 찍어둔 기록물을 소홀히 한 것이 큰 오점으로 남는다.
이후 영업장을 대전 중동으로 옮겨 인쇄소를 운영하다 잠시 손을 놓은 적이 있다. 건강과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2012년 8월에는 폐업을 하기에 이른다. 
 
▲ 어려웠던 순간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려움이 없이 어찌 삶을 살 수 있나? 기계화, 산업화의 흐름은 인장기술도 바꾸어 놓았다. 기술인에서 인쇄인으로, 그마저 일의 부진함과 괴로움으로 인해 일관된 생활로 전락한다. 성서의 말씀과 불경의 말씀을 떠올렸다. 가진 자보다, 없음의 마음 편함이 오늘의 생활신조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보람 있었던 순간은
장애인이라는 타의 동정으로 비추어져 동정으로 주는 일이라면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한 때 자존심을 내세운 점이 부끄럽다. 오늘이 있기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주신 많은 기관의 선후배분들과 친지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아 고마움을 느낀다. 도장을 새겨주면 너무 좋아 하던 모습들이 새롭다.
 
▲ 왜 지금까지 손으로 도장을 만드는 일을 하나
궁여지책이랄까 마는 남은 삶을 앞으로도 계속 눈이 보일 때까지 손도장 기술을 연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힘이든 만큼 보람도 있지 않은가? 밤을 지새우며 납기를 맞추기 위해 일하던 어제가 새롭다.

▲ 도장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바램이 있다면
기계문명에 차이고 인감도장마저 사인으로 외면 받는 현실이다. 컴퓨터 작업 등으로 수요는 줄겠지만 손기술이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전통이란 아주 묻혀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 길을 지켜내는 노력을 할 것이다. 주어진 일에 열정으로 일에 임한다면,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 믿는다. 여유스럽지만 앞으로 할 일들을 찾아 발로 뛰어야 할 것 같다.
 
▲ 바램, 소망이 있다면
바램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웃과 거리감 없이 지내며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뒤돌아보며 사는 것이 남은 생애 내 소망이다. 관에서 수주하는 어떤 일이든 맡겨만 준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경륜을 바탕으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우수한 제품을 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내일을 열고 싶다.
또 인장을 소중히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몇 안 되는 인장인들이라도 힘을 합쳐 손으로 만든 작품만을 한데 모아 세인들 앞에 내보이는 계기가 왔으면 한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