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에서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라는 공익광고를 본적이 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 일년에 하루만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 90분만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 1분만

태극기를 다는 국경일 하루에만, 국가대항 축구경기를 붉은악마가 돼 응원하는 그 90분간만, 순국선열에 대해 묵념을 하는 1분 동안에만 ‘내 나라와 나라사랑’을 생각하게 된 우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애국심은 진부한 옛 시대의 관념이고, 이를 강조하는 것은 국가주의의 강요된 요구인 마냥 치부되고 있다.

애국심, 공익광고라는 키워드를 검색어에 입력해 보기만 해도 많은 블로거와 누리꾼들의 글에 비판적인 어조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몇 십년 전 일제강점기 때의 우리는 애국을 할 대상마저 우리의 것이 아닌 남의 나라를 사랑하도록 강압적으로 요구받았다.

그 서글픔은 고 손기정 옹이 금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내 나라라는 대상이 없다는 것,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가질 존재조차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한국 브랜드를 보면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경험을 한다. 오히려 외국에 있으면 애국심이 생긴다고도 한다.

내 나라를 벗어나 외부에 있을 때야 비로소 나라의 존재감과 나라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현대의 우리들을 예전 식민지 시대의 선조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

4월 13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4년이 되는 날이다. 중국 상해에서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이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임시정부를 수립해 나라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그 날이다.

식민지 치하로 인해 나라 밖에서 정부를 세워야했지만 그렇게라도 독립 국가를 이루고자 했던 선조들의 염원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던 1919년의 3·1운동은 어떠했는가. 평범한 학생들이, 가사를 돌보던 어머니가, 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맨 몸으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내 나라를 열망했다.

수 많은 과거의 우리들이 희생해 세운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라는 것을 현대의 우리들은 망각한 채 살고 있다. ‘나라’와 ‘애국심’이라는 단어를 고리타분하다 치부하기엔, 나라를 세운 우리의 역사와 선조들의 희생이 너무도 뼈아프다.

앞서 말했던 공익광고를 보고 24시간, 365일 항상 나라를 생각해야 하냐며, 구시대적인 애국심 강요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매일매일 바쁘게 살아하는 현대인들에게 매분매초 나라사랑을 생각하며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의 이벤트로 퇴화해 버린 우리의 나라사랑 마음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선조들의 그 간절한 마음을, 나라 잃은 피지배자 위치에서 살아야했던 선조들의 그 고통을 잊지 말자는 의미인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미친 존재감’이라는 말이 있다. 방송 등에서 별다른 분량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의 외모, 스타일 등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내 나라에 대한 나라사랑도 매 순간 힘을 주어 도드라져야 하는 개념이 아니다. 생활에서 큰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미친 존재감’이 나라사랑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