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순백의 모래, 흑백영화 같은 사랑.
다혜가 나를 받아줄까? 매정하게 내칠까? 뇌에서 끄집어낸 온갖 상념으로 가득 했다. 바보처럼 혼자서 고민하고 절망하는 시간은 이제 끝이야. 깨질 때 깨지더라도 부딪쳐봐야 후회가 남지 않는 거야…
 
정말 오랜 세월이었다. 진창길을 지나기도 했고 가시덤불도 있었다. 그 길에서
피었다 지는 수많은 꽃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꽃이었고, 내 머리카락은 날로 희끗희끗 희여만 갔다.

한 사내가 흔들리는 하얀 추억을 되찾기 위해, 하얀 눈으로 덮인 도로를 헤치며 거침없이 페달을 밟았다. 찬바람 속에서도 가슴은 뜨거워지고, 밤새 가라앉은 심장이 속도를 낸다.
아, 끈끈한 여자. 청순, 건강, 우아, 섹시함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여자. 그래도 도시의 깔끔한 삶을 살아갈 것 같은 신비로운 여자.
늪의 이미지는 음침하다.

아! 한번 디디면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여자.
멀리 두둥실 떠가는 괴물 형상의 구름을 실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냘픈 몸매에 항시 짧은 미니를 걸치고, 쇼 커트를 쳐 올린 여자. 그 창밖의 여자가 애타게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여전하지만 그토록 반갑고 사무치게 설렐 수가 없었다. 마치 태어나 처음 보고, 느끼고, 호흡할 것 같은 그녀로부터 그리움의 향수가 가득 베어 나왔다.
물속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어난다고?
바다는 출렁이면서 제 몸을 씻어내고 세상의 온갖 때를 지우고 고기들을 풀어놓는다. 투명한 바다가 붉은 바위에 부딪치고 거친 해일로 솟아올랐다.

어쩌면 이토록 슬프고 외로울까?
다혜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그동안 나의 육체를 따라서 뱃전에 부딪쳐온 저 파도처럼. 그 수많은 육체에 대해서 나는 무엇이라고 하여야 할까? 흐르는 물속에도 이끼가 자라는 것을 보았어. 가라앉은 낙엽들이 물고기의 집이 되어 한세상 흐르는 것을 보았고, 내 유년의 위험한 짐승, 허둥대는 미친개와 같은 이 육체는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헤매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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